-여성에게 관심은 없지만 여성을 정의하기 좋아하는 사회에서는 여성을 원거리로 보기 때문에 여성이 늘 뭉뚱그려진다. 이 뭉뚱그려져 표현된 세계는 실재가 되고, 점점 비하되기 좋은 모양새로 빛어진다. 대표적으로 '소녀 취향'이라는 말은 순수함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흔히 취향의 유치함을 일컫는다. 순수함에 대한 찬양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미성숙, 감정적, 자기애 과잉이라는 비하로 뒤집힐 수 있다.

 

-여자만 먹거리에 비유될까. 남자도 물론 먹거리에 비유되곤 한다. 그러나 그 범위가 휠씬 좁고 활용도가 낮음은 물론이요, 나타나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일단 남자의 몸은 별로 먹을 게 없다. 초콜릿, 고추, 소시지, 오이, 바나나 둥인데 대부분 성기에 집중되어 있다. 돼지 수육부터 자연산 회까지 온갖 유기농 산해진미를 온몸에 고루고루 갖춘 여성의 몸에 비하면 영 부실하기 짝이 없을뿐더러, 가공 육류도 있고 음식의 궁합도 서로 잘 안 맞는다.

 

-여성에 게 꾸준히 전달하는 이런 중류의 말은 걸코 무심결에 튀어 나오지 않는다. 식사 준비는 너의 묶이라고 가르쳐주려는 결연한 의도가 담긴 행동이다.얼굴 예쁜 여자는 3년이지만 음식 잘 하는 여자는 평생 간다는 버르장머리 없는 말이 있다. 여성의 성 역할로 밥하는 임무를 정해놓고 이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굳이 확인하려 드는 이유는 성을 빌미로 굴복시키겠디는 의도다. '밥하는 여자'라는 너의 본분을 알려주겠다는 의지 표명, 일종의 훈육이다. 이런 마음의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늘 여성이 필요했던 남성들 입장에서는 이 본분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움직임이 남성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위협한다고 여겨진다. 정체성의 상실, 내 위치의 봉괴, 나는 여자(의 몸과 밥)가 팬요한데 여자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 엇갈림을 어떻게든 막아보겠다는 의지가 극단적인 폭력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 문명화 과정'이 마무리되는 시기에, 여성은 한 남성을 위한 가정주부이거나 자본가를 위한 임금노동자로, 혹은 둘 다로 훈련되었다. 이들은 수세기 동안 자신에게 사용된 실제적 폭력을 자신에게로 돌리면서 내면화했다. 그들은 이를 자진해 한 것으로, 사랑으로 규정했다. 자기억압에서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였다. 이런자기 억압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제도적.이테올로기적 소품을 교회,국가,가족이 제공했다.

 

-가난하며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해서 욕망마저 가난해질 의무는 없다. 오직 배고품을 해소하기 위해서만 입을 벌리는 1차원적인 입은 언제나 지배 권력이 원하는 입이었다. 취향 따워는 아예 형성할 수 없는 그런 입, 욕망할 줄 모르는 입, 배고쯤에 길들여진 입. 그러나 가난한 입도 욕망할 줄 알고, 기분이라는 게 있다. 2050년에는 세계 인구가 100억 명에 육박할 전망이다. 오늘날에도 음식의 33퍼센트가 버려지지만 굶는 사람은 무려 8억 명에 이른다. 늘어나는 인구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면 이러한 양극화는 더 심해질 것이다.

 

-이중에서 가부장의 밥상과 가장 거리가 있는밥은 시위 중에 나눠준 주먹밥이다. 광주에서 주먹밥을 나눠주던 여자가 후에 피투성이가 되어 만섬의 택시 위로 쓰러지는데, 이매 만섭은 "주먹밥 ....'이라고 중얼거린다. 이 여성은 주먹밥과 동일시된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주먹밥을 받았으니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 그가 준 밥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움'이 거의 여성의 역할로 국한된다면? '어머니가 끓여준 된장찌개'에 대한 향수처럼,어머니를 기억하는 방식이 '나를 위해 어머니가 해준 음식'에 머무는 중후한 남성들의 목소리를 한두 번 들었는가.
 영화 속에서 여자가 등장하면 그저 밥이 따라오거나 여자의 몸을 보여준다. 크게 보면 이 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택시 운전사>에서 여성 인물들이 밥을 주는 모습은 여자와 밥을 세트로 생각하는 상상력의 한계가 빚은 산물이다. (집 안의 여자는 밥과 세트이며 집 밖의 여자는술과 세트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에서 여성의 저항사는 잊혔다. 남성의 무장투쟁이 항쟁의 대표적 얼굴이 되었고, 여성 의병이나 여성 독립운동가가 지워졌듯이 광주항쟁에서 여성의 참여도 지워져왔다. 여성의 역사는 축적되는 속도보다 지위지는 속도가 더 빠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남성연대가 여성의 역사를 지운다. 마치 매번 먹어치우는 밥처럼. 어찌랴. 그래도 매번 밥을 짓듯이 여성들은 계속 역사를 직조할수밖에. 

 

-일상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문을 거듭하는 태도는 인간의 우울한 마음이 불러들이는 질문이다. 타인에 대한 가장 일상적인 무례와 침범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기보다 그를 아는 척하는데 더 공을들인다는 점이다. "너는 누구니"라는 케빈의 마지막 질문이 결정적 한방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상대에게 애정이 없으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너'를 정의한다. '너'에 대한아는 척이란 더 이상 너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술하게 등장하는 진부한 대사, 네가 나를 알아? 하지만 이 진부한 대사가 실은 인간관계의 본질이다. "너 자신을 알라"처럼 인생의 화두다. 대부분이 나 자신을 모르고 너를 아는 척하는 소란함 속에 사느라 지처가기 때문이다. 공부에 왕도가 없듯이 사람을 아는 길에도 왕도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너는 누구인가, 여기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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