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이면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승우 (문이당,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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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가 읽은 그의 소설들과 그에 대한 기사들과 두 번의 인터뷰 내용을 두루 섭렵해 가면서, 가장 자유로운 방식으로 우선 그의 유년기를 재구성해 볼 생각이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며, 충실한 연대기를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의식 안쪽에 단단하게 붙어 그의 삶과 문학을 지배해 온 질기고 억센 몇 개의 큰 흉터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들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어차피 지금의 그는 자신이 살아 낸 이제까지의 삶의 흔적들을 피상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하나의 표정이다. 표정에 층은 있지만, 흔적들은 질서를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서로 몸을 섞고 있다.


▒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쉽게 운명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그런 점에서 내 고향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운명론자들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진보라고 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내 유년의 고향 마을은 물처럼 고여 있었다. 운명은 방죽에 고인 물과 같은 것이었다.


▒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 독자들 또한 그 마취제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뿐이다.


▒ 모든 예감에 비극의 냄새가 묻어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숙명의 울림 때문이다. 예감은 열람이 금지된 숙명의 세계를 부지불식간에 엿보고만 자의 머리 위에 그 부정에 대한 징벌로 떨어지는 벼락, 그 벼락 같은 천재지변의 떨림이다. 그래서 숙명은 예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모든 숙명은 비극의 광배를 두르고 있게 마련이다. 숙명적이라는 말은 비극적이라는 말과 동이어로 쓰이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 그때 나는 열여덟 살, 참으로 어중간한 나이였다. 굳이 제도적인 학령으로 따지자면 고등학교 2학년, 그러나 학교 공부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시들하고 재미가 없던 시절이었다. 현실도 이상도 너무 멀리 있었다. 현실은 발붙이기를 허락하지 않고, 이상은 꿈꾸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아득한 이상이었고, 비틀거리는 현실이었다.


▒ 이러한 사유 안에서, 그의 지반은 그 자신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신과 같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도 아니다. 그녀이다. 그러면 그녀는, 이 남자로부터 이만한 떠받듦의 대상이 된 그 여자는 행복한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에게 그녀는 완벽함의 이데아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완벽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그녀는 허상일 수 있다. 그가 만든 완벽함의 허상. 그가 보고 바라고 의지하고 꿈꾸는 그녀는 실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창조해 낸 완벽한 여자를 그녀에게 투사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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