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민규 (창비,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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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히 있지 않고, 나는 울었다. 전력을 다한 말이어서 곧 허기와 외로움이 쉬이 밀려들었다. 잘…들었다. 이윽고 세끄라탱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얘야,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란다. 이 세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것을 지켜봤단다. 그리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어. 어느 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은 나지 않았단다.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 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173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 결국엔 폼(form)을 완성하는 거야. 끝없이 계속 가다듬는 거지. 실은 공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이쪽의 다듬은 폼을, 자세를 보내는 거야. 알겠니? 탁구에서 졌다는 말은, 결국 상대의 폼이 나의 폼보다 그 순간 더 완성되었다는 뜻이야. 자, 스매시에 있어 너의 폼이 생긴 게 언제였지? 일주일 전이요. 그럼 일주일간 가다듬은 폼이 그물을 넘어오는 거야. 그것을 내가 리씨브한다면… 좋아, 쉽게 삼십년 탁구를 쳤다 치자, 그럼 다시 말해 내가 삼십년간 가다듬은 폼이 널 리씨브 하는 거야. 라켓에 닿은 공은 순식간에 일주일의 폼에서 삼십년의 폼으로 성질이 변해버리지. 그건 이동이야, 공간과 차원의 이동. 오래전 탁구가 와프와프라 불린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지. 즉 한쪽의 폼을 다른 쪽에 전이하는 수단이었던 거야. 그게 탁구의 정체야. 저편의 완성된 폼을 리씨브하면서, 또 스매시하면서 이쪽의 폼을 완성해갈 수 있는거니까. 우주는 늘, 이런 식으로 자신의 폼을 전달해왔어. 광활한 보드를 넘어, 시간의 그물을 넘어, 와프(warp)해서 말이야.


▒ 1. 반응도구(지렛대, 열쇠, 원판)
    2. 강화매개물(먹이, 물)
    3. 자극요인(빛, 큰 소리, 작은 전기충격)
    4. 실험유기체(쥐, 비둘기)

 그건 마치… 세계(世界)잖아요. 아무튼 그 시합이 내 탁구인생에 있어 전환점이 된 건 사실이란다. 아, 이젠 못 당하겠구나. 먹고살고자 하는 이 조건반사를… 내가 당해내지 못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지. 그 비둘기는 어떻게 되었나요? 어떻게 되긴,

 그렇게 살다 죽었지.


▒ 이제 지구는 완전히 그의 볼이 되었어. 동료들도 그걸 인정하는 눈치였지. 마침 마블링 컬러의 볼링공이 대유행하던 시기여서, 아무도 지구를 의심하지 않았던 거야. 한달이란 시간이 지나갔어. 지구의 곳곳에선 대재앙이 끊이지 않았지. 서서히, 그도 이상한 낌새를 채기 시작했어. 크고 작은 균열이 그의 지구에도 어느덧 생겨나 있었거든. 지능지수가 110은 되기도 하고 해서, 그는 드디어 고민을 시작했어. 하지만 그에겐 시간이 부족했지. 이유는 생활, 바로 생활때문이었어. 마침 이웃의 월터씨가 지붕손질을 부탁하기도 했고, 비서실의 마거릿이 함께 술 한잔 하는 건 어떠냐고 전화로 물어왔기 때문이야. 게다가 일요일엔 추수감사절을 준비하는 대규모 예배가 있었지. 예배를 마치고 나니 또 어지간히 피곤이 몰려왔어. 부족한 잠을 자느라 또 지구에 대해선 까마득히 잊어버렸지. 다시 한주가 시작되었어. 쉴새없는 출근과 업무와 볼링이 여지없이 시작되었지. 지구가 쪼개진 것은 목요일 저녁의 두번째 경기, 초구를 던졌을 때였어. 스트라이크! 환호도 잠시, 그는 자신의 지구가 쪼개지는 걸 똑똑히 목격했어. 그때였지. 엄청난 강진을 모두가 느낀 것은. 지진은 무려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어. 다행히 네바다엔 큰 피해가 없었지만 그는 그때서야 자신의 실수를 알게 되었지. 그후의 세계는 그야말로 끔찍한 것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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