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승우 (창해,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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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순간 나는 같이 읽고 있던 보르헤스를 그녀와 나 사이의 암호로 섣불리 이해했다. 희귀한 우연에 대한 끈질긴 사색은 운명론으로 유도되기 쉽다. 운명론은 종종 사랑의 불가항력적인 성격을 부각시킴으로써 사랑의 중요한 동력인 개인의 욕망과 선택을 가린다. 운명적인 사랑이 운위되는 자리에서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는 문장은 불순하거나 부정확한 것으로 판명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는 문장이 올바른 유일한 문장이 된다. 나도 그랬지만, 사랑에 빠져 들어가는 순간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운명론자의 영혼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을 평가와 판결의 영역에서 제외시킨다. 이제 사랑은, 내가 '한'일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내가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찾아온 것이 되고,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면책의 특권을 갖는다.


▒ 사랑은 다른 차원에서 온다. 앎을 사랑의 조건으로 내세울때 사랑은 인간의 역사가 되고 자유의지의 산물이 된다. 그러나 사랑을 앎의 조건으로부터 분리시킬 때 사랑은 초월적인 근거를 확보한다. 이른바 운명의 영역. 다른 차원.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어찌할 수 없다'의 세계. 사랑은 앎을 전제로 하지 않고, 앎의 결실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는 있다. 앎이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 사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랑이 알게 하는 앎은 사랑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앎과 같은 성격이 아니다. 사랑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앎은 양과 부피의 앎, 즉 정보이다. 여기서는 무엇을 얼마나 아느냐 하는 성격이 있다. 그러나 사랑이 알게 하는 앎은 정보가 아니라 이해이다. 양이나 부피가 아니라 깊이이다. 세목들이 아니라 핵심, 순간이면서 영원인 어떤 포착이다.


▒ 미쳤다는 것은, 미쳤음을 자각하고 시인하는 것은, 그 미친 상태에 머물러 있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말해야 옳다. 그런 점에서 미쳤으면서 미치지 않았다고 부정하고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치명적이라는 것은 운명의 표정이다. 나는 내 안에 그런 열정이 있는지 몰랐다고 고백했고, 그것은 사실이었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 나는 나의 사랑이 육화의 단계로 진화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쉬운 진화는 없다. 몸을 얻기가 영을 얻기보다 더 힘들다. 열망할 수 있지만, 왜냐하면 그것은 혼자 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같이 있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일상의 공유, 간섭과 끼어들기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니까. 상대방의 동조를 얻어야 하는 것이니까.


▒ 나는 안절부절못해하며 휴대폰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 모이느냐고 묻지 않았고, 물을 수가 없었고, 그녀는 말해 주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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