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의 사생활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승우 (문학동네,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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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이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그녀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궁금했으면서도 그랬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 아직 그녀가 지워지지 않고 있는 까닭이었다. 다시 내 삶을 그녀가 있는 현실 속으로 끌고 가고 싶지 않았고, 또 내 삶의 현실 속으로 그녀를 끌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그녀를 잊었다는 것과는 달랐다. 나는 그녀를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현실 속에서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없는 현실에서 살기. 내 긴 가출은 그런 시도였고, 그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형의 곁에 그녀가 없었다는 것도 그런 점에서는 다행이었다. 가끔씩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럴 때면 옛날처럼 나 혼자만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다 주책없다는 생각을 하며 쑥스럽게 웃곤 했다. 나에게 그녀는 없는 사람이고, 그것이 좋고 또 마땅했다.

 
▒ 당신을 위해 준비했어요. 내 마음, 언제부터 서 있었는데 눈길 한번 안 주나요? 더 얼마나 서 있으란 말인가요? 녹아내리기 전에, 스르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에 내 마음을 찍어줘요, 사진사 아저씨…… 그녀의 노래는 내 몸 속으로 향기처럼 번졌다. 아직도 그랬다.


▒ 형에 대한 연민이 왈칵 솟구쳐올랐다. 나는 형의 괴로움과 슬픔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나의 이해는 부분적이고 빈약했다. 형이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을 포기했다는 것은 아주 나쁘지 않았다. 정말로 나쁜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의 자리 찾기를 포기한 자신을 견딜 수 없어하고 괴로워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소망한 것은 이 세상에서의 자리 찾기를 포기하고 만 자신을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는 초월의 정신이거나 무감각이었을 거라는 생각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은 존재의 변신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 아닌가. 지금의 존재를 버리고 전혀 다른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그의 변신에 대한 꿈은 얼마나 크고 절망적인 욕망인가. 존재를 건너뛰려는 욕망만큼 큰 욕망이 어디 있는가. 욕망을 지우려는 욕망만큼 절망적인 욕망이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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