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하여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수전 손택 (이후(시울),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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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동굴 속에서


▒ 원래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은 상황에 개입하지 않는 활동이다. 가솔린 통에 다가가는 베트남 승려, 몸통에 양팔이 묶인 이적 행위자를 총검으로 찌르는 벵골의 게릴라 사진 등 인상적일 만큼 대성공을 거둔 동시대 포토저널리즘이 공포감을 자아내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사진작가들이 다음과 같은 인식, 즉 사진이냐 살아 있는 피사체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진을 선택하는 것도 타당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상황에 개입하면 기록할 수 없고, 기록하면 상황에 개입할 수 없다.


▒ 한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되더라도, 정확히 말해서 사진으로 찍을 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인가가 되더라도, 그 사건을 사건으로 만들어 주는 결정적인 요소는 (가장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이다. 해당 사건 자체에 명칭이 붙어 그 성격이 규정되지 않는 한, 제아무리 사진에 찍혔다한들 그 사건이 벌어졌다는 증거는 없는 셈이다. 그리고 사진이라는 증거가 사건을 사건으로 만들어주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정받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사진은 한 사건에 명칭이 붙은 다음에야 뭔가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이 도덕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는 그에 상응하는 정치 의식이 존재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정치가 없다면, 역사를 수놓은 살육 현장을 담은 사진일지라도 고작 비현실적이거나 정서를 혼란시키는 야비한 물건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우울한 오브제


▒ 미국에서는 도덕주의자, 파렴치한 약탈자, 어린아이, 이방인까지도 사라져 가는 것을 기록하려 한다. 그리고 사라져 가는 것을 사진으로 찍음으로써 그 사라짐을 재촉하기도 한다.



시각의 영웅주의


▒ 위조된(거짓된)회화는 예술사를 왜곡한다. 그렇지만 위조된 사진(수정되거나 변조된 사진, 사진설명이 거짓인 사진)은 현실을 왜곡한다.


▒ 사회 의식을 갖춘 사진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불변의 의미를 담고,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진은 늘 특정한 맥락에 놓이기 때문에 그 의미도 변질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한 맥락에서 어떤 사진이 당면 문제에(특히 정치적으로) 사용됐다고 치자. 그렇다면 곧 그 사진이 그렇게 쓰일 수 없거나, 그렇게 쓰이는 게 적절치 않게 되는 맥락이 등장하게 된다.


▒ 사진의 미학적 경향[피사체를 미화하는 경향]탓에, 세상의 고통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사진은 그 고통을 중화시켜 버린다. 카메라는 경험을 축소하고 역사를 구경거리로 변질시킨다. 사진은 연민을 자아내는 것만큼 연민을 없애고 감정을 떼어낸다.



이미지-세계


▒ 사진 이미지를 통해서 세계의 모든 것(예술, 재앙,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미 엄청나게 많이 알게 된 사람들은 막상 직접 현실을 대하게 되면 자주 실망하고, 놀라워하며, 감동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진 이미지는 우리가 처음 겪어본 그 무엇에서 감정을 제거해 버리곤 하는데, 정작 사진 이미지가 불러일으킨 감정은 우리가 실제 삶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어떤 일들은 직접 겪어볼 때보다도 사진의 형태로 겪을 때에 훨씬 더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 카메라는 선진 산업사회를 작동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방식으로 현실을 규정한다. (대중을 위해서 스펙터클[구경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그 첫 번째라면, (통치자를 위해서) 감시 대상을 포착해 주는 것 두번째 방식이다. 이미지 생산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급해 준다. 이제 이미지 상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이미지와 상품을 소비할 수 있는 자유가 자유 자체와 동일시될 것이다. 경제 부문에서 소비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정치적 선택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지를 무한히 생산하고 소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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