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우주보다 더 큰

 

-나를 불러낸 것은 어떤 빛나는 얼굴이었지만, 걷는 것은 오롯이 나다. 겉에서 걸음을 맞추어 걷던 얼굴이 지금의 설경 위에 거듭 나타나도록, 나는 기억의 환등기를 비출 뿐이다. 그러니 이 산책은 멈추고 싶지 않아 멈춰지지 않고, 나는 기쁘면서도 자꾸 울상이 되고 만다. 

 

-내일은 눈이 녹을 것이다. 눈은 올 때는 소리가 없지만, 갈 때는 물소리를 얻는다.

 그 소리에 나는 울음을 조금 보탤지도 모르겠다.

 괜찮다. 내 마음은 온 우주보다 더 크고, 거기에는 울음의 자리도 넉넉하다.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

 

-나는 그녀가 쓴 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 모자를 쓰든 그녀의 아름다움은 훼손되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나 더 흐르든 "이제 모자를 좀 벗는게 어때?"라고 말하지 않기. 그 응시와 침묵이 내 편에서의 유일한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회색의 힘

 

-침잠은 표면적인 것과 멀어지므로 필연적으로 깊이를 얻는다(그것은 힘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동시에 무게도 얻는다. 내가 무게를 느낄 때를 곰곰이 따져보면, 거기에는 늘 지나친 자애와 자만이 숨어 있었다. 나를 크게 만들려고 하다 보니 우울해지는 것이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 나의 느낌이나 존재를 스스로 부풀리고 싶어 하지 않는지 잘 살펴야 한다. 

 체스터튼은 [정통]에서 그러한 무게의 해악을 설명하며, "자신을 중시하는 쪽으로 가라앉지"말고 "자기를 잊어버리는 쾌활함 쪽으로 올라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엄숙함은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웃음은 일종의 도약이기 때문이다. 무거워지는 것은 쉽고 가벼워지는 것은 어렵다." 

 결국 발목에 추를 달 줄도, 손목에 풍선을 달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양극을 번갈아 오가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두 겹의 감정을 포용하라는 것이다. 추를 달 때 풍선을 기억하고, 풍선을 달 때 추를 잊지 않기. 

 

언덕 서너 개 구름 한 점

 

방 안에네 있을 때 세계는 내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나 걸ㅇ르 때 세계는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윌러스 스티븐즈, [사물의 표면에 대하여]

 

 -정말 그것뿐이다.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 그리고 무한 그리고 무(無).

 나날이 성실한 산책자로 살아가지만, 나는 아직 언덕과 구름을 다 보지 못하고 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죽은 자들을 보며 삶에 대한 열정과 동력을 얻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죽음에서는 죽음만 얻고 싶다. 타인의 죽음에서 다른 그 무엇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주 조그만 희망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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