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방(문학과지성시인선 56)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이승훈 (문학과지성사,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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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마시는 남자

그는 분하다
그는 의자를 발로 차고
한 손에 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신다
그는 고향에서
마악 돌아왔다
그는 원통하다
모자를 쓰고
한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그는 억울하다
순수한 마음으로 살고 싶다
그는 비틀댄다
그의 얼굴은 목에서
떨어진다 그의 얼굴은
쓰레기통 옆에 뒹군다
그의 마음도 뒹군다
가을밤 낙엽도 뒹군다
갑자기 비가 온다
그는 착한 일을 하고 싶다
그는 목에서 떨어져
뒹구는 그의 얼굴을 본다
마른 고양이가 달린다
골목에는 아무도 없다
그는 어지럽다
그는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그는 계속 술을 마신다
그는 고향이 그립다
그는 사람이 그립다



▒ 나는 믿었다

나는 개같은 세월을 믿었다
없는 것들을 믿고
깨진 거울을 믿고
나는 새 한마리 없는 하늘에
새 한마리 있다고 믿었다
나는 네가 없는 땅에
네가 있다고 믿었다
나는 희망이 없는 밤에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나는 염소새끼들이 없는 광장에
염소새끼들이 있다고 믿었다
나는 사랑이 없는 새벽에
사랑이 있다고 믿었다
나는 믿었다
나는 있다고 믿었다
있다고 믿은 게
나를 삼켰지만
나는 과연 어디 있었으며
나는 과연 누구였는지
나는 너무 오래 나를
먹어 치웠다
꿈을 먹어 치우고
없는 것들을 먹어 치우고
오늘 남은 건
내가 먹어 치운 것들
나를 먹어 삼키려고
입을 벌리는
깨진 거울 속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없는 것들의 얼굴
나는 꿈같은 세월을 살았다
나는 없는 것들 속에
나체로 뒹굴었다
나는 없는 것들을
있다고 믿었다
그게 잘못인가?



▒ 꿈이었다

모두 모두 꿈이었다
화만 나던 마흔 해
모두가 꿈이었다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
내가 만진 것
내가 껴안은 것
모두가 꿈이었다
구름과 구름의 싸움과
언덕과 언덕의 싸움과
피로와 피로의 싸움과
한밤의 치욕과 배반과
정들고 버림받고
정처없이 헤매던 날들과
한밤의 스탠드 바와 불빛과
내가 들고 있던 시커먼 술잔과
나의 얼굴과 나의 얼굴의 통곡도
나의 얼굴의 사막도
그리고 아버지의 마약도
그리고 어머니의 정신질환도
그리고 아내의 신경쇠약도
모두가 꿈이었다
그동안 쓴 시보다
그동안 버린 시가 많고
그동안 만난 사람보다
그동안 헤어진 사람이 많고
고호의 귀와 고호의
하늘이 많고
고향이 많고
꿈도 많다
절벽도 많았다
꿈도 많았으니
난리도 많았다
난리가 많았다
시방도 난리가
나는 중이지만
꿈이 고향이
모두 거짓말이었지
나는 꿈을 재우려 했지
꿈이 나를 재우면
나는 잠든 척 했지
마른 가슴과 비틀어진 감정과
다친 이마를 방바닥에 대고
나는 잠든 척 했지
꿈이 나를 깨웠지만
내가 꿈을 깨웠지
그랬지 그랬지 그랬었고
그랬지 새파란 새파란
내에 어리던 나의 꿈도
작은 방에 엎드려
가을날 자고 있던 경아도
모두 불러 오늘은
함께 살았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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