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전집 1(시)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수영 (민음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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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식


남의 집 마당에 와서 마음을 쉬다

매일같이 마시는 술이며 모욕이며
보기 싫은 나의 얼굴이며
다 잊어버리고
돈 없는 나는 남의 집 마당에 와서
비로소 마음을 쉬다

잣나무 전나무 집뽕나무 상나무
연못 흰 바위
이러한 것들이 나를 속이는가
어두운 그늘 밑에 드나드는 쥐새끼들

마음을 쉰다는 것이 남에게도 나에게도
속임을 받는 일이라는 것을
(쉰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면서)
쉬어야 하는 설움이여

멀리서 산이 보이고
개울 대신 실가락처럼 먼지 나는
군용로가 보이는
고요한 마당 위에서
나는 나를 속이고 역사까지 속이고
구태여 낯익은 하늘을 보지 않고
구렁이같이 태연하게 앉아서
마음을 쉬다

마당은 주인의 마음이 숨어 있지 않은 것처럼 안온(安穩)한데
나 역시 이 마당에 무슨 원한이 있겠느냐
비록 내가 자란 터전같이 호화로운
꿈을 꾸는 마당이라고 해서



▒ 구름의 파수병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詩)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산정에 서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할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우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늦은 거미같이 존재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간과 마루 한간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러운 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다보다
날아간 제비와같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죽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반역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생활

  
시장거리의 먼지나는 길옆의
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 멍석의
호콩 마마콩이 어쩌면 저렇게 많은지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모든것을 제압하는 생활 속의
애정처럼
솟아오른 놈

(유년의 기적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나)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
나는 자꾸 허허… 웃는다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아서
나는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친다

생활은 고절(孤絶)이며
비애이었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조용히 조용히…


▒ 사랑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 장시 1


겨자씨같이 조그맣게 살면 돼
복숭아 가지나 아가위 가지에 앉은
배부른 흰 새모양으로
잠깐 앉았다가 떨어지면 돼
연기 나는 속으로 떨어지면 돼
구겨진 휴지처럼 노래하면 돼

가정을 알려면 돈을 떼여보면 돼
숲을 알려면 땅벌에 물려보면 돼
잔소리 날 때는 슬쩍 피하면 돼
─채귀(債鬼)가 올 때도─
버스를 피해서 길을 건너서는 어린 놈처럼
선뜻 큰길을 건너서면 돼
장시(長詩)만 장시만 안 쓰려면 돼

*

오징어발에 말라붙은 새처럼 꼬리만 치지 않으면 돼
입만 번드르르하게 닦아놓으면 돼
아버지 할머니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어물전 좌판 밑바닥에서 결어 있던 것이면 돼
유선(有線) 합승자동차에도 양계장에도 납공장에도
미곡창고 지붕에도 달려 있는
썩은 공기 나가는 지붕 위의 지붕만 있으면 돼
<돼>가 긍정에서 의문으로 돌아갔다
의문에서 긍정으로 또 돌아오면 돼
이것이 몇 바퀴만 넌지시 돌면 돼
해바라기 머리같이 돌면 돼

깨꽃이나 샐비어나 마찬가지 아니냐
내일의 채귀를
죽은 뒤의 채귀를 걱정하는
장시만 장시만 안 쓰려면 돼
샐비어 씨는 빨갛지 않으니까
장시만 장시만 안 쓰려면 돼
영원만 영원만 고민하지 않으면 돼
오징어에 말라붙은 새처럼 5월이 와도
9월이 와도 꼬리만 치지 않으면 돼

트럭 소리가 나면 돼
아캌시아 잎을 이기는 소리가 방바닥 밑까지 울리면 돼
라디오 소리도 거리의 풍습대로 기를 쓰고 크게만 틀어놓으면 돼

겨자씨같이 조그맣게 살면서
장시만 장시만 안 쓰면 돼
오징어발에 말라붙은 새처럼 꼬리만 치지 않으면 돼
트럭 소리가 나면 돼
아카시아 잎을 이기는 소리가 방바닥 밑까지 콩콩 울리면 돼
흙 묻은 비옷이 24시간 걸려 있으면 돼
정열도 예측 고함도 예측 장시도 예측
경솔도 에측 봄도 예측 여름도 예측
범람도 예측 범람은 화려 공포는 화려
공포와 노인은 동일 공포와 노인과 유아는 동일……
예측만으로 그치면 돼
모자라는 영원이 있으면 돼
채귀가 집으로 돌아가면 돼
성당으로 가듯이
채귀가 어젯밤에 나 없는 사이에 돌아갔으면 돼
장시만 장시만 안 쓰면 돼



▒ 절망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네 얼굴은


네 얼굴은 진리에 도달했다
어저께 진리에 도달했다
어저께 환희를 잃었기 때문이다

아아 보기 싫은 머리에 두툼한 어깨는
허위의 상징
꺼져라 20년 전의 악마야

손에는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가다가다 기침을 하면서
집에는 차압(差押)을 해온 파일오버가 있는데도
배자 위에 얄따란 검정 오버를 입고
사흘 전에 술에 취해 흘린 가래침 자국─
아니 빚쟁이와 싸우다 나오는 길에 흘린
침자국

죽어라 이성을 되찾기 전에

네 얼굴은 진리에 도달했다
어저께 진리에 도달한 얼굴은
오늘은 술을 잊은 얼굴이다

가구점의 문앞에서 책꽃이를
묶어주는 철쭉꽃빛 루주를 바른
주인 여자의 얼굴─
그 얼굴은 네 얼굴보다는
간음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조금은 생생하지만
죽어라 돈을 받기보다는
죽어라 돈을 받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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