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환상(세계사시인선 2)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이승훈 (세계사,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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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만난 날

너를 만난 날은
날개 달린 날이다
현실이 사라지고
다른 현실이
태어난 날
그러니까 그날은
초현실의 날이다 훨훨
새가 날아오던 날
너를 만난 날은
만신창이가 되어
여름을 힘겹게 보내고
문득 가을이 오던 날
너를 만난 날은
필연의 날이다
머리에서 손이 빠져 나오고
다리에서 얼굴이 튀어나오던
허리에서 설탕이 쏟아지던
불안 비참 치욕 따위가
지루하고 맥이 없던 날들이
모조리 일어나 빛이 되던
아아 내 어깨 쭉지에
문득 날개가 돋던 날
너를 만난 날



▒ 너와 나의 황혼

설사 꿈이더라도
가슴 터지는
원통한 악연이더라도
너와 나의 황혼 속에
들어 있는
이 사랑이
부르조아적인 허위더라도
이 사랑이
마약이더라도
애인아 설사
너를 속이더라도
이게 저문 시대의 길이고
병든 서울의 꿈이고
느닷없이 가을날
너를 찾아와
너를 덮친
이 사랑이
이 징그러운 그리움이
이 달콤한 폐허가
이 피의 단내가
파고드는 황혼
모든 지식은 허위다
느낌이 진리다
설사 꿈이더라도
꿈이 해방이다
눈이 내릴 것만 같은
가을 저녁
너를 사로잡는
이 갈증 속에
들어있는
독약같은 우수
사납게 물들이는
이 번개
이 우뢰
끝없이 파고드는
너와 나의 황혼



▒ 의자와 싸우는 너

의자 위에
의자가 있고
의자 위에
또 의자가 있고
의자 위에
또 의자가 있다
아슬아슬하다
의자 위에 있는
의자 위에 있는
의자 위엔
추위도 있고
가난도 있다
기인 여름 오후
의자와 싸우는
네가 있다
너는 의자 위에
다른 의자를 놓고
의자 위에 다시
다른 의자를 놓는다
갑자기 전화가 온다
「어서 떠나요 어서」
옛날의 상처가 번쩍인다
의자 위에 놓인
의자 위에 놓인
비인 의자 위에
다시 비인 의자가 놓이고
바람 한점 없는 여름날
기차가 지나가면
의자는 흔들린다
의자는 불안하다
의자에겐 세계관이 없다
의자는 다만 있다
다만 있다는 것
아아 다만 있다는 것
아슬아슬한 의자 위에 !



▒ 네가 찾는 것

여름날 오후
언 책방에서
네가 찾는 건
책이 아니다
땀을 흘리며
네가 찾는 건 너의
마음인지 모른다
여름날 오후
모자를 쓰고
먼지 속에서
네가 부지런히 찾는 건
시간인지 모른다
흘러간 시간
헌 잡지를 뒤지며
헌 잡지에 문득
코를 박는 건
너의 가슴을
박는 건지 모른다
길 모퉁이 허름한
책방에서 오늘도
헌 책을 뒤지는
너의 손과 가슴과
부르튼 입술은
달리던 버스에서
갑자기 뛰어내려
헌 책방으로 달려가
헌 책을 뒤지는
너의 얼굴은
문득 흐려진다



▒ 길에서 만난 너

「아니 이게 누구야?」
너무 놀라 바라보면
너의 가슴에선
하얀 새가 날고
가을 오후 햇살은 따시고
「시장엘 가는 거로군」
너의 손을 잡으면
너의 손은 문득
장미가 된다
너의 마른 손은
내가 잡았기 때문에
붉은 장미가 되어
나를 덮는다
가을 오후 햇살은
너의 구두를 적시고
「참 오랫만이군」
너의 구두를 보며
낮은 소리로 말하면
너의 구두는 구름이 된다
가을 햇살만 타는
아스팔트 위에서
「뭐라고 말 좀 해봐」
너는 말이 없다
너의 가슴에선 문득
하얀 유리조각이 떨어진다
그건 새들이 아니다
그건 혁명도 아니다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는
너의 얼굴 너의 가슴
가을 햇살만 옛날 같다



▒ 여름 광장

버려진 부츠가 있고
여름 해가 있고
부츠 한짝이 있고
녹슨 시계가 있고
시계 옆에는
떨어진 반지가 있다
반지 옆에는
목걸이도 있다
팔찌도 있고
부로우치도 있고
안경도 있다
있다는 건
버려진다는 것
여름 광장엔
네가 버린 빗
네가 버린 칫솔
네가 버린 부츠
부츠 옆에 놓여 있는
거대한 수레바퀴
그 옆에 놓여 있는
거대한 의치
그 옆에 놓여 있는
거대한 기차
그 옆에 놓여 있는
거대한 기차 바퀴
그 옆에 놓여 있는
거대한 모자
펑펑 쏟아지던 해
웅크리고 있는 나
죽은 나



▒ 너를 안으면

너를 안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바람불던 저녁도 사라지고
무슨 정신도 사라진다
너를 안으면
병든 거리도
소리없이 사라진다
너를 안으면
불안도 사라진다
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마흔 개의
어둠이 사라지고
너의 얼굴에
나를 묻으면
마흔 개의
감옥도 사라지고
우울도 사라지고
만성 신경증에 시달리던
밤들도 사라진다
너의 가슴에
손을 대면
나의 손도 사라진다
이젠 네가 있으니까
이젠 네가 나이니까
너의 가슴에
텀벙 뛰어든다
그래서 이젠
너의 얼굴도 볼 수 없다



▒ 너를 만나면

너를 만나면
우선 타버린 심장을
꺼내 보여야지
다음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해야지
잘 익은 빵을
한 바구니 사야지
너를 만나면
우선 웃어야지
그럼 나는
두배나 커지겠지
너를 만나면
가을이 오겠지
세상은 온통 가을이겠지
너를 만나면
나는 세배나 커지겠지
식사를 하고
거리를 걸으면
백 개나 해가 뜨겠지
다신 병들지 않겠지
너를 만나면
기쁘고 한없이 고요한
마음이 되겠지
아아 너를 만나면
감기로 시달리던
밤들에 대해
전쟁에 대해
다시는 말하지 말아야지
너를 만나면
이렇게 비만 내리는
밤도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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