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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의 나비떼
두어 件의 막무가내가 있으니
바람과 꽃가루가
길 떠나는 냄새
네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릴 때
내 마음의 나비떼, 나비떼
▒ 이 노릇을 또 어찌하리
안은 바깥을 그리워하고
바깥은 안을 그리워한다
안팎 곱사등이
안팎 그리움
나를 떠나도 나요
나에게 돌아와도 남이다
남에게 돌아가도 나요
나에게 돌아와도 남이다
이 노릇을 어찌하리
어찌할 수 없을 때
바람 부느니
어찌할 수 없을 때
사랑하느니
이 노릇을 또
어찌하리
▒ 몸을 꿰뚫는 쓰라림과도 같은
내 사랑하느니
어디 어느 때의
느닷없는 쓰라림
밤 열두시, 밑도끝도없이
지진처럼 몸을 흔들고 지나가는
마음의 파문
뭘 아는 듯한 슬픔
뭘 아는 듯한 공복감
아는 듯한 흔들림
그 모든 걸 합쳐도 이름붙일 수 없는
까닭 없을 수밖에 없는
마음에 이는
지진과도 같은 파문……
일상의 모든 일이
그것에서 도망가는 일에 지나지 않게 하는
지진으로 지나가는
地層의 金과도 같은
(아, 노다지를 찾았다!)
몸을 꿰뚫는 쓰라림과도 같은……
▒ 기다림에 관한 명상
메시아가 오시면
이 세상에 살까
천만에
우리는 그를 다시
못박을 거야
'메시아'란 항상 못박힌다는 뜻이고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게 되지
자기 자신을 기다리게 되지
내가 메시아가 아닌데?
자기 자신을 기다리지 않으니
영원히 메시아가 없지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건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정당화하는 일이기 쉽거든. 메시아가 다 해주실 것이고, 대신 죽어주실 테니까)
궁핍에 처형된 우리들의 삶.
하긴 오지 않는 자,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데가 이 세상이야. 오지 않는 걸 기다리는 동안─그게 우리 일생이지.
▒ 달도 돌리고 해도 돌리시는 사랑이
한 처녀가 자기의 눈 속에서
나를 내다본다
나는 남자와
풍경 사이에서 깜박거린다
남자일 때 나는
말발굽 소리를 내고
풍경일 때 나는
다만 한 그루 나무와 같다
달도 돌리고 해도 돌리시는 사랑이
우리 눈동자도 돌리시느니
한 남자가 자기의 눈 속에서
처녀를 내다본다
<해설>
물 주기, 숨통 터주기
-진형준
▒ …… 온갖 살아 있는 것들과의 접촉을 통해, 에로틱한 환희를 구가하려던 순간, 시인의 눈에는 그 생의 기쁨 뒤에 숨어 있는 상처가 보인다. 그래서 필경 헐벗은 에로티시즘은, 눈물겨운 합일이면서 그 안에 이미 고통을 품고 있는 것이 된다. 그 헐벗은 마음의 상처는, 바로 그 헐벗었기에 오는, 어쩔 수 없이 입게 되는 상처이다. 다시 이야기하면 그 상처의 끝에는 죽음의 인식이 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입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처는 죽음이 아니겠는가? 정현종의 헐벗음과 상처 인식은, 그렇게 환희와 고통의 뒤범벅처럼 엉기어 있다. 그 상처는, 어떻게 보면 인간이면 누구나 입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상처의 아픔은, 헐벗은, 여린 시인의 감수성만이 진실로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상처입음에 무심함, 혹은 아예 상처 따위를 입지도 않는 의식 자체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일종의 뻔뻔스러움, 살아 있음의 포기, 혹은 삶을 감추고 있는 껍질의 단단함을 의미할 지도 모른다. 그런 삶은 어찌 보면 고통 따위는 잊어버릴 수 있는 삶일 수는 있어도,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은 아니다. 인간이 진실로 이 세상에 살아 있음, 그 생명스러움의 경이는, 이렇게 필경 살됨의 인식, 상처 인식으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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