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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꽃나무에 술을 뿌리다
술에 꽃잎이 지다
아버지는 채송화를 보고 울고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선다
산 너머 우박이 쏟아진다
▒ 아버지의 나이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 나그네
한 알 모래 속에 바다가 있다
한 알 모래 속에 섬이 있다
그 섬에 나그네 한 사람이
쓰러져 있다
▒ 홀로 차를 마신다
홀로 차를 마신다
기어이 너를 죽인다
너를 죽여 삽을 들고 땅에 묻는다
잠시 성긴 눈이 내리고
몇 백년이 지나간다
홀로 차를 마신다
기어이 삽을 들고 너를 파낸다
나뭇가지를 주워 강가에 너를 태운다
진홍가슴새 한 마리
흰 불길 밖으로 날아가고
난초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 동박새
죽어서도 기뻐해야 할 일 찾아다니다가
죽어서도 사랑해야 할 일 찾아다니다가
어느 날 네 가슴에 핀 동백꽃을 보고
평생 동안 날아가 나는 울었다
▒ 장작을 패다가
장작을 패다가
도끼로 발등을 찍어버렸다
피가 솟고
시퍼렇게 발등이 부어올랐으나
울지는 않았다
다만
도끼를 내려놓으면서
가을을 내려놓고
내 사랑을 내려놓았다
▒ 길
님 그리며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며 님 그린다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님 그리며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며 님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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