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나무들(문학과지성 시인선 161)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정현종 (문학과지성사,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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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다고 말했다


두루 그립다고
너는 말했다.
그러자 너는
꽃이 되었다.

그립다는 말
세상을 떠돌아
나도 같이 떠돌아
가는 데마다
꽃이 피었다.
닿는 것마다
꽃이 되었다.

그리운 마음
허공과 같으니
그 기운 막막히 퍼져
퍼지고 퍼져
마음도 허공도
한 꽃송이!

두루 그립다고
너는 말했다.




▒ 붉은 가슴 울새
    ─ 어바인 시편


붉은 가슴 울새는
가슴 털 색깔이 붉어
오호라 심장이 말하자면
바깥에 나와 있는 셈인데요
(새들의 심장은 실로
깃에 깃들여 있거니와)

봄에 그 붉은 가슴은
아침마다 창가에 와서 울어
아침의 저 신선 투명을
제 목소리 속에 굴려,
굴리고 굴려,
그 빛 속에,
그 맑음,
그 방울 속에,
또는 사랑 덩어리와도 같이
우주는 한없이
생생하여
모든 가슴 두근두근 팽창하고 있었는데요

이 여름 그 새는 보이지 않아도
그 노랫소리는 여전히
귀에 울리고 있습니다
울리고 울려
내 사랑 자지러져.




▒ 그림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물에 비쳤다.
나는 그 물을 액자에 넣어 마음에 걸어놓았다.
바라볼 때마다 그림자들은 물결에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림자들보다 더 흔들렸다.




▒ 꽃잎


벚꽃잎 내려 덮인 길을
걸어간다─ 이건 걸어가는 게 아니다
이건 떠가는 것이다
나는 뜬다, 아득한 정신,
이런, 나는 뜬다,
뜨고 또 뜬다.
꽃잎들,
땅 위에 깔린 하늘,
벌써 땅은 떠 있다
(땅을 띄우는, 오 꽃잎들!)
꿈결인가
꽃잎은 지고
땅은 떠오른다
지는 꽃잎마다
하늘거리며 떠오르는 땅
꿈결인가
꽃잎들……




▒ 한 정신이 움직인다
    ─ 문학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위하여


 한 정신이 들어 있는 표정이 움직인다. 백호광명의 자리 몸과 함께 움직인다. 마음의 음영, 마음의 안개, 마음의 공기인 표정이 움직인다.
 이 표정, 이 움직임은 닫혀 있지 않다. 제 속에 갇혀 있지 않다. 그 표정과 움직임은 무한 바깥(타자)과 스스로의 내적 깊이를 향해 한없이 열려 있고 겸손히 듣고 있음으로써 생기는 섬세한 진동을 그 주위에 무슨 아지랑이처럼 잔잔히 퍼뜨린다……




▒ 앉고 싶은 자리


숲길 옆 뉘어놓은 나무토막 위에
어떤 아저씨가 앉아서 쉬고 있다.
나는 목례를 하며 지나간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사람은 없고
그 나무토막 자리만 환하고 고요하다.
(아까는 사람만 보았던 것이다)
매운 겨울 오후의 햇살이
落木 숲을 비추는 맑은 날,
문득 환하고 고요한 나무토막 자리여
앉기 전에 벌써 나는 녹는다
그 자리에 녹고 앉고 싶은 마음에
녹는다, 그 동안 나는
앉아 있고 싶지 않은 자리에, 아,
너무 오래 앉아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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