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정호승 (열림원,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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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련(石蓮)


바위도 하나의 꽃이었지요
꽃들도 하나의 바위였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나를 찾은 후
나의 손을 처음으로 잡아주신 후
나는 한 송이 석련으로 피어났지요
시들지 않는 연꽃으로 피어났지요

바위도 하나의 눈물이었지요
눈물도 하나의 바위였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나를 떠난 후
나의 손을 영영 놓아버린 후
나는 또 한 송이 석련으로 피어났지요
당신을 향한 연꽃으로 피어났지요





▒ 발자국


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은 발자국들끼리
서로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

남은 발자국들끼리
서로 뜨겁게 한 몸을 이루다가
녹아버리는 것을 보면

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철길에 앉아


철길에 앉아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철길에 앉아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멀리 기차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기차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코스모스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기차가 눈 안에 들어왔다
지평선을 뚫고 성난 맷돼지처럼 씩씩거리며
기차는 곧 나를 덮칠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낮달이 놀란 얼굴을 하고
해바라기가 고개를 흔들며 빨리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었다





▒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불국사 종루 근처
공중전화 앞을 서성거리다가
너에게 전화를 건다

석가탑이 무너져내린다
공중전화카드를 꺼내어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린 뒤
다시 또 전화를 건다

다보탑이 무너져내린다
다시 또 공중전화카드를 꺼내어
너에게 전화를 건다

청운교가 무너져내린다
대웅전이 무너져내린다
석등의 맑은 불이 꺼진다

나는 급히 수화기를 놓고
그대로 종루로 달려가
쇠줄에 매달린 종메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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