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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이라
그래 섬광
그건 이미 예전에 내가 찔린
비수였지
그런 비수
나는 너를 생각했고
풀 한 포기 없는 들판에 불붙어 타오르는
한 그루 마른 나무를 생각했고
그건 나였고
넌 그걸 지켜보는 들판이었지
나는 시뻘건 지평선을 향해 달려가지만
끝내 목이 말라
너에게 내 땀을 보여주기 싫어
내 피도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건
신기루뿐이야
그 가증스러운 꿈 말이야
나는 너의 낙타가 아니고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빛나는 칼을 들고
너의 눈을 후비고 싶은 거야
▒ 펄럭이는 그림자
1
바람 없는 맑은 날
길을 나서는 내 주머니 속에 든
한 움큼의 바람
올려다보지 않네 오려 붙인 것 같은
저 하늘을 그러면
자꾸 목이 말라
주머니를 열어 바람을 놓아주면
먼지들이 춤을 추네
흩어지는 머리칼을 쓸며
나는 이상한 불에 휩싸여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나를 따르는 음음
펄럭이는 그림자
2
가는 비 내리는 저녁
길을 나서는 내 주머니 속에 든
이르게 다가온 어둠
길거리의 스피커가 젖고 있어
거기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도
거기 우산을 씌워주고 싶은데
주머니를 열어 어둠을 풀어헤치면
달아오르는 가로등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가는
습한 거리에 찍힌 이상한 발자국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고
나를 따르는 우우
펄럭이는 그림자
▒ 겨울, 어지럼증
거품을 물고 숨을 몰아쉬는
라디에이터를 보았다
차가운 유리창 바깥으로 흔들리던
잎가지들이 흐려지는 걸 보았다
따뜻함 냉정함
현기증 저버림
마음은 이삼중이고
그럴수록 표정은 단조로워진다
눈가엔 주름
이마엔 주름
입가엔 주름
아무 텐션 노트도 들어 있지 않은
옛날 식의 맑은 화음을 들었다
그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나는 또 왜
이렇게……
가슴이 찡하여……
▒ 황혼
1
터무니없이 낮은 국기 게양대에 하루종일 걸려 있던 새마을기를 내리는 수위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피에로처럼 우스꽝스럽고 슬펐다 새마을기가 천천히 따라 내려오는 줄을 쥐고 내게 돌린 그 눈빛 그는 한번도 구질구질해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높이여 내일 다시 그 높이로 걸릴 깃발이여 너를 내려야만 밤이 온다 아저씨가 깃발을 차곡차곡 접는다
2
을지로 입구 보도 블록으로 긴 그림자들이 다닌다 또는 서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그림자들 거기 그보다는 짧게 쓰레기통의 그림자가 섞여 있다 누군가 쓰레기통의 덮개를 위로 들어올린다 담배꽁초를 고르는 그 덕지덕지 때가 앉은 더러운 손 그 손만이 그림자를 버린다 황홀히 붉은 손 그의 손이 떨자 황혼의 해가 부르르 떤다 그 손만이 은빛 쓰레기통에서 번쩍 섬광이 일게 한다
<해설>
푸른 쓰레기통 속의 시 - 김진하
▒ …… 그러나 그러한 혼융이나 조화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 자신의 자의식이 지속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시인으로 하여금 시─음악으로 몰입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시인 자신의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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