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창비시선 161)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정호승 (창작과비평사,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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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며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자나도록
摩旨를 울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 흐르는 서울역


선운사 동백꽃을 보고 돌아와
서울역은 붉은 벽돌 하나 베고 지친 듯 잠이 든다
나는 프란체스꼬의 집에 가서 콩나물비빔밥을 얻어먹고 돌아와
잠든 서울역에 라면박스를 깔고 몸을 누인다
잠은 오지 않는다
먹다 남은 소주를 병나발을 불고 나자 찬비가 내린다
동백꽃잎 하나가 빗물을 따라 플랫폼 쪽으로 흐른다
보고 싶은 사람은 흐르는 물과 같이 내버려두어도
언젠가는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게 되는지
한 미친 여자가 찬비에 떨다가 내게 입을 맞추고 옆에 눕는다
옷을 벗기자 여자의 젖무덤에서도 동백꽃 냄새가 난다
낡은 볼펜으로 이혼신고서를 쓰던 때가 언제이던가
헤어지느니 차라리 그대 옆에 남아 무덤이 되고 싶던 날들은 가고
다시 병나발을 불자 비안개가 몰려온다
안개 속에서 포크레인이 서울역을 끌고 어디로 간다
동백꽃 그림자가 눈에 밝힌다



▒ 까닭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해설
사랑의 시학-하응백


▒ 과거의 시가 '관념적 체험의 픽션'의 소산이었다면, 추상적 민중을 향한 노래였다면, 그의 시는 이제 자신을 대상으로 한 시로 변했다. 때문에 그것은 구체성을 가진다. 구체적 사건을 진술한다는 것은 시인에게는 아픔이다. 그러나 그 아픔을 노래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아픔을 시인에게 줄 수 있다.


▒ 결국 사랑의 끝은 제행무상이거나 기독교적 초월이다. 정호승의 이번 시집에서 가끔씩 불가적 선시풍의 노래와 그리스도적 사랑의 시편이 함께 보이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직관과 초월은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 도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시(문학)는 언제나 세속의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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