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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라만상이 모두 그렇다
줄을 서면
마음이 놓인다
줄을 서면
비로소 행복하다
불안하지 않다
살기 위해선
줄을 서야 한다
줄을 배반하면 안 된다
이상한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갑자기 헤엄치고 싶다든가
대장에게 미소를 짓는다든가
개미에게 말을 한다든가
개미에게 인사를 한다든가
개미를 매미라고 우긴다든가
그러면 안 된다
대장의 명령에 따르는 게
제일 중요하다
살기 위해선
자신의 쓸개를 대장에게
바치는 놈들도 있으니까
「애초에 태어난 게 잘못이야」
중얼대면 안 된다
그럼 끝장이다
삼라만상이 모두 그렇다
▒ 영원한 동작
이렇게 끝나면 된다
이렇게 끝나면 된다
모자를 쓰고
카페에 앉아
웃으면 된다
커피를 시키면 된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담배를 피우면 된다
담배를 피우며
벽이나 바라보면 된다
커피가 나오면
커피에 설탕을 넣으며
웃으면 된다
「개같은 새끼들」
커피에 크림을 넣고
숟갈로 저으면 된다
이 절망을 저으면 된다
이 찢어진 가슴을 젓고
그걸 한손으로 들고
말없이 마시면 된다
커피를 마시면 된다
절망을 마시면 된다
납과 아연은 마시면 안 된다
장마는 아직도 계속된다
그는 커피를 마신다
그는 답답해 보인다
그는 절망한다
그는 웃는다
허나 그는 커피에 넣은
설탕이 어떻게 녹았는지
그것도 궁금하다
▒ 어떤 시인의 이상한 체험
너를 찾아가면
너의 가슴에선
하얀 비가 내리지
말라깽이 시인이
너의 가슴에 내리를
하얀 비를 보면
너의 가슴에선
마악 종달새가 날지
정말이야 그때
너의 허리에선
하얀 설탕이 쏟아져
난 그게 보여
난 그걸 핥지
오늘도 미친놈한테
어이없이 당하고
부지런히 너를 찾아가면
너는 웃기만 하지
「정말 끔찍한 세상이야」
내가 말하면
너의 가슴에선
하얀 비가 쏟아져
하얀 빗잘에
내 몸이 젖지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 잊을 수 없는 밤을 위한 기호
그는 갑자기
나를 껴안네
바람부는 골목에는
사람들이 없네
그의 심장은 뛰고
그의 심장은 떨리네
바람부는 밤
그는 두 팔로
더욱 세게
나를 껴안네
가로등 불빛이 떨리네
그의 손도 떨리네
나는 정신이 없네
그의 손은
내 허리에 닿고
이건 꿈의 풍경
가로등 불빛은 새가 되어
펄럭이며 날아가고
그의 심장은 뛰고
그의 얼굴은 핼쓱하고
그가 썼던 모자는
땅에 떨어지고
나는 그의 심장이
새가 되어 나는 걸 보네
어느 깊은 밤의 일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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