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불제 민주주의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유시민 (돌베개,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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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나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선언한 대로 대한민국이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민주공화국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제헌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기본 질서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을 다 지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일종의 '후불제 헌법'이었고,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였다.


낚시

▒ 언론인은 사실(fact)을 낚는다.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사실과 사건의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지 않는다. 언론인은 자기가 독자나 시청자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데 필요한 사건과 사실을 찾는다. 남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언론인 스스로 보도하기 싫은 것은 보도하지 않거나 작게 보도한다. 그러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하지만 별 의미가 없는 사실이 된다. 객관적으로 별것 아닌 사실도 언론인이 말하고자 하는 목적에 유용한 것이면 크고 중요한 사실이 된다.

▒ 정보를 통제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최강 권력은 언론이다. 국민 대다수가 매일 구독하는 몇몇 신문의 지면 편성과 논조와 보도 내용을 지배하는 사주와 그 대리인들이 대한민국을 지배한다. 그들이 네모난 창을 만들면 국민은 네모난 하늘을 본다. 그들이 둥그런 창을 만들면 국민이 보는 하늘은 둥그렇게 된다. 그들은 국민의 눈과 귀, 국민의 입을 자처하지만 그 눈과 귀와 입은 사실 그들 자신의 것이다. 그들은 선출되지 않으며 신임을 묻는 일도 없다. 교체되지도 않으며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그들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정치 중립

▒ 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법률이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 ②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법률이 명시적으로 허용하지 않은 모든 것이 금지된다". ③ 독재 국가에서는 "법률이 명시적으로 금지한 것은 금지되며 법률이 허용한 것도 금지된다".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는가.


위선

▒ 왕국의 신민에게는 자애로운 '국부'와 '국모'가 필요하다. 그러나 공화국의 주권자에게는 대통령과 영부인이 필요할 따름이다. 우리 마음속의 왕을 죽여야 민주공화국이 산다. 대통령을 왕으로 생각하는 견해는 우리의 문화유전자 안에 남은 침팬지의 그림자일 뿐이다.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런데 헌법적 · 법률적 제약 조건을 받아들이고 5년 계약직답게 행동하는 대통령은 대통령을 왕처럼 생각하는 백성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어서 인기를 잃는다. 사실은 계약직 공무원이면서 마치 왕처럼 행동하는 대통령을 권력 오남용을 거부하는 시민의 저항과 비판에 부닥쳐 인기를 잃는다. 우리 사회가 이 딜레마를 해소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에필로그

▒ 악한 목표를 내걸고 악한 시스템을 만드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는 대중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악한 시스템은 거의 언제나 선한 목적을 위해 악한 방법을 정당화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악한 시스템을 만드는 권력자들은 '경제적 번영', '자유민주주의 수호', '법치주의 확립', '국가의 정통성'과 같은 선한 목표를 내세우면서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불평등과 불공정을 조장한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내걸고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언론의 독립성을 목 조른다. 법률의 이름으로 인권을 모욕하며, 국가 안보를 내세워 평화를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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