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개는 사람처럼 <무대 뒤>로 숨어버리는 수단을 쓰지 않는다. 개는 언제나 무대의 전면에 나서며, 배경과 배역, 대사를 일러주는 이의 위치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들만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이 단역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되고 자신들이 출연하는 연극의 주인공을 찾게 된다. 그들은 다른 역할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이런 역할을 맡게 되었을까 경악스러워하며 역할을 바꾸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배역은 숙명적인 것이므로 역할 변경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이에 반해 개들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하며 떳떳이 앞을 바라본다.
▒ 녀석이 사랑스러웠던가? 충직했던가? 한 존재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그 존재에 온갖 장점들을 갖다붙인다. 그런 값싼 대가를 치름으로써 그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위선은 구역질이 나지만 나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의 위선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 동물들의 참을성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동물들은 달리 어떤 방도가 없음을 깨닫게 되면 자연 또는 인간의 법칙―동물들에게는 마찬가지일 것이다―에 순응한다. 동물들은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들은, 멀어져만 가는 미래의 순간을 그리며 기력을 소비하는 우리들 인간에게 있어서처럼, 허비되는 것이 아니다. 동물들에게 그 기다림의 시간이란 고정된 현재이며 끝없이 계속되기는커녕 의식의 매순간에 끝이 나버리는 것이다. 하루 동안 집 안에 갇히는 경우, 개는 즉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차지할 것이다. 개는 여러 방을 돌아다니다가 가장 편안하게 보이는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고 잠을 자게 마련이다.
▒ 글을 쓰는 행위는 틀림없이 죽음과 밀접한 관련―예전에 라면 이러한 관련을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견딜 수가 없다―이 있다. 만일 타이오가 살아 있다면 나는 녀석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녀석과 함께 사는 것만으로 행복할 것이며(불행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나는 녀석의 삶을 정리해 보고 싶은 욕구를 억제할 수 없다. 녀석에게 또 하나의 삶을 마련해 주고자 하는 것일까?
▒ 인간은 정말이지 위선으로 가득하다. 가엾게 여긴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동물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 동물들로 배를 채우는 것이다. 이런 식의 가증스런 희극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강자는 약자의 껍질로 몸을 치장하지만 약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 만일 당신이 사랑하는 이를 안락사시킨다면 그것은 그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것인가, 당신의 고통을 덜기 위한 것인가? 죽음을 맞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마찬가지의 처신을 할 수도 있다.
▒ 고통이란 그 표현 수단을 찾게 되면 이슬처럼 증발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누구보다도 불행한 이들인 반면 누구보다도 불평할 것이 적은 이들이다.
▒ 당신은 내게 말할 것이다. 「당신이 누리는 기쁨들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만 하지 않겠소?」 하지만 그 기쁨들을 전해 주는 손과 빼앗는 손이 같은 것이라면?
▒ 우리는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살아남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꽃들, 가축들, 우리의 부모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생존하는 동안 육신의 여러 부분들이 우리에게서 벗어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 남는 것이다. 훗날 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과 추억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그러고서도 우리는 <산다>라고 말한다.
▒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려 하고 무언가를 뒤쫓으려 하는 녀석의 본능적 습성들을 막았던 나 자신을 책망한다. 우리와 함께 있는 녀석은 실업자와 같은 신세였다. 한가하다는 것이 녀석에겐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녀석은 노동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 이 점에서 대부분의 인간들과 마찬가지이다 ― 활동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이 점 역시 인간들과 마찬가지이다.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cerpt] 달려라 아비 - 김애란 (0) | 2009.11.30 |
---|---|
[excerpt] 침묵의 뿌리 - 조세희 (0) | 2009.11.15 |
[excerpt] 섬 - 장 그르니에 (0) | 2009.10.23 |
[excerpt] 용초도근해 - 박영준 (0) | 2009.09.18 |
[excerpt] 도정 - 지하련 (0) | 2009.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