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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의점에 간다
▒ 큐마트를 경영하는 부부는 사십대 후반이다. 아마도 그들은 지난 아이엠에프 때 명예퇴직금으로 큐마트를 연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 부부의 관상이 온화했던 탓에 나는 내 추측을 확신했다. 그 나이에도 의심이 적고,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들이란 대개 그들을 부드럽게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기를, 배반을, 착취를, 불평등을 모른다. 그들은 아마 그들이 노력한 만큼 벌거나 노력한 것 이상으로 벌어온 사람들일 것이다. 모든 부드러움에는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잔인함이 있다. 그게 사실이 아닐지라도 내가 그걸 사실로 만들어버리는 이유는 그러고 나면 내 처지가 덜 속상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순간 엘에이의 한인촌을 습격한 흑인과 닮아 있다. 편의점에 가는 나는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면서 흑인이다. 나는 그들을 폄하하는 대신, 그들의 환경을 덜 부러워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정직하고 가난하고 그들은 부정직했으므로 풍족하다. 가치란 편의점에 물건과 같아서 그런 식으로도 교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 그녀는 '이 사람이 지금 정말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인지, 미안해서인지, 내가 만나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인지, 진짜로 그렇게 하자고는 못하겠지 하는 마음에 물어보는 것인지, 예의상 그렇게 하는 것인지' 고민한다. 그녀는 "그쪽이 편한 곳에서"나 "그쪽 편한 시간에"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배려하고 있지만 자신이 배려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영원한 화자
▒ 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모르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다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한참 후 그는 네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참 후 나도 네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참 후 그는 너와 잘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참 후 나도 너와 잘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 머리 위로는 흉조처럼 지하철이 긴 선을 그으며 지나가고 있었고 우리는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 당신은 너와 헤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종이 물고기
▒ 그는 알 수 없는 말들의 신기한 발음을 즐기며 글자들을 탐식하듯 훑어나갔다. 텔레비전 편성표와 영화광고, 날씨정보 등 신문에 씌어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그는 한자나 영어를 읽을 줄 몰랐고, 그가 읽는 신문은 대부분 구멍투성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면에선 다행이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속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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