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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당신께
▒ 살아 있는 것에는 분명히 생채기가 있습니다. 촌에서 자란 사람은 누구나 그걸 알고 있습니다. 들꽃이나 나무에도, 새나 강아지나 들고양이에도, 하다 못해 구르는 돌멩이까지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생채기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꿈
▒ - 이상했어요. 80년대초에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생각했지요. 독재자 니들이 아무리 나를 제약해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도 있다고 말예요. 예를 들면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나 상상력 같은 것들, 꿈들…… 한데, 아니었어요. 미국에 간 지 6개월쯤 지나고 나서 나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상을, 생각을 그리고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지요. 그건 무서운 발견이었어요. 혹시 이해할 수 있으세요?
▒ 글을 쓰다가도, 라디오를 들으며 혼자 차를 마시다가도 그들의 전화를 받으면 나는 그들의 결혼생활 속으로 끼여들었다. 함께 웃고 울고 그리고 이야기해주고…… 그럴 때 분명 나는 그들의 금 안에 있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면 나는 다시 금 밖으로 밀려나왔다. 내가 금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내게 전화를 건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때부터 소설을 쓰고 싶어했던 것은 아닐까. 영원히 술래가 된 것처럼 금 밖을 서성이면서 그들이 그것을 타는 모습을 지켜보기…… 그리고 그들처럼 해보는 것을 상상하기…… 그래서 밖에 서 있는 자의 쓸쓸함과 안에 있는 자들의 복닥거림을 엮어내보기…… 그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로 소설쓰기가 아니었을까?
▒ 언젠가 그녀도 잊혀질지 모르지만, 잊혀져서 간결하게 정리될지도 모르지만, 잊혀졌다고 해서 꽃이, 꽃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꽃잎이 지고 나서도 뿌리와 줄기와 싱싱한 이파리가 남아 있는 한, 아니, 그 이파리마저 지고 흰눈에 덮여 줄기의 형체조차 희미한 겨울날에도 우리가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무거운 가방
▒ 창밖에서는 한떼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우르르 승용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일행들과는 분명 달랐다. 그들에게는 젊음의 냄새와는 또다른 분위기가 엿보였다. 그것은 부유한 냄새였다.
동트는 새벽
▒ 그리고 저녁이면 탈의실에서 계급을 갈아입던 아이들. 우중충한 작업복의 아이들은 재빠르게 아름답고 멋진 아가씨로 변해갔고 거울 앞은 늘 만원이었다. 겨우 안면을 익힌 순영과 걸어나오던 퇴근길에 정화는 갑자기 주저앉아 울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생산하는 민중이 역사의 주인임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 그 민중이 되지 못한 얼치기와, 스스로가 역사의 주인이면서 그걸 모르는 바보들. 쌀쌀한 바람은 피어오르는 시커먼 굴뚝연기를 흩뜨리며 정화의 뺨을 마구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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