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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꽃잎’ 속에 등장하는 두 남녀 주인공의 모습은, 여느 다른 영화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들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두 인물이 선남 선녀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뒤틀려버린 부조리한 현실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바로 수 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사건이 발생한 현실이다.
미쳐버린 소녀와 다리를 저는 인부의 만남
소녀는 천진난만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광주로 놀러 온 오빠의 대학교 친구들 앞에서 노래 ‘꽃잎’을 부르며 수줍게 춤을 췄다. 소녀가 너무 순수해서였을까. 소녀는 민주화 운동에 참가한 엄마가 자신을 버리는 것이라고 착각하고서 끝까지 엄마의 치맛단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비극이 시작된다. 소녀의 엄마는 계엄군의 총에 맞게 되고, 혹여 딸의 손을 놓칠세라 꼭 잡고 있었던 엄마는 소녀의 손을 쥔 채로 죽게 된다. 총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다급했던 소녀는 엄마의 손을 떨쳐버리려 하지만, 이미 사후경직이 시작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손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녀는 손톱으로 죽은 엄마의 손등을 피가 날 정도로 긁으며 결국 떼어버리지만, 엄마의 죽음과 자신이 목격한 광주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소녀는 결국 미쳐버린다.
그녀가 그대로 엄마와 함께 죽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살아남았고, 여러 사내들에게 폭력과 강간을 당하며 이곳 저곳을 부랑자처럼 떠돌게 된다. 인부 장을 만나게 된 것도 그와 다르지 않다. 인부의 무엇에 끌렸는지는 모르지만, 들판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를 자신의 오빠로 생각했던 소녀는 그를 ‘오빠’라고 부르며 쫓아가게 된다.
두 사람의 관계의 부적절함이 부각되는 것은, 두 사람의 나이 차나 사회적 계층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소녀가 민주화 운동이라는 사건을 겪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만나지 않았을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엄마의 말을 듣고서 가만히 집에 있었더라면, 아니, 시위행진 도중에 건물 안에서 가만히 기다리라는 말만 들었어도 그 둘은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그러지 않았고, 결국 인부 장을 만나게 된다.
평범하게 중학교를 다녔을 소녀는, 여러 명의 남자들에게 강간을 당했고, 처음의 인부 장도 소녀에게 그러했다. 하지만 소녀와 인부의 관계는 그 둘이 함께 살게 되면서 점차 다른 관계로 바뀌어 나간다. 단순히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인부 장은 소녀에게 점차 마음을 열어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려 하고, 소녀를 보살피기까지 한다. 한쪽 다리를 저는 막벌이 일꾼으로 살아가는 그에게는, 정신이 멀쩡하진 않으나 이제 막 피어나는 여자가 되려는 어린 소녀와 함께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의 보살핌도 소녀의 발작적인 광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을 결속 시켜주는 계층적 공감대 형성
어느 날 무덤가에서 소녀의 독백을 들을 인부 장은 소녀가 단순히 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녀의 광기의 원인을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상당히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영화 속의 두 사람의 결합은 두 인물의 하층민이라는 계급적 특성을 바탕으로 한다. 두 인물 다 공통적으로 사회적으로 하급 계층이다. 인부 장은 다 허물어져 가는 외딴 집에서 홀로 사는, 한쪽 다리를 절며 이렇다 할 가족이나 친구도 없는 형편이다. 가족들이 다 죽어버리고, 미쳐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소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중 인부 장은, 처음에는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인 소녀를 물리적이고 성적인 폭력으로 대하지만, 나중에는 소녀의 아픔을 알게 되고, 비로소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 인부 장과 소녀의 관계는 이렇듯 변화하게 되고, 그가 소녀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두 사람 다 소외 받는 약자 계층이라는 공통된 의식에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이 두 인물을 실제적인 생활과 연관되어 있는 계층적 관점으로 본다면, 다른 어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당위성보다 더 단단하게 두 사람을 결속 시키게 된다. 두 사람을 그러한 계층적 관점에서 묶을 수 있는 이유는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있다.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소녀의 경우나, 사회적으로 소외 받으며 간접적으로 지배계급에게 배제 당하며 살고 있는 인부 장의 경우나, 모두 직간접적으로 억압 받고 폭력에 지배 받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부 장과는 달리,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소녀를 찾고 있던 오빠 친구들의 모습은 대립되는 양상을 보인다.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소녀를 찾던 오빠의 친구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의욕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은 포기하게 된다. 실제적인 생활과 연관되어 있지 않고 관념적 당위성만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었기에, 실제적인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쉽게 의욕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은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민주화에 대한 각종 이론과 이념을 바싹 꿰고 있을 그들이지만, 지나치게 현실을
인부 장만이 소녀를 이해 할 수 있었던 이유
영화 속에서 소녀가 만나는 다른 인물들도 아무도 소녀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소녀가 왜 미쳐버렸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그 근원적인 원인을 모르는 이들은 결코 소녀를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녀를 도와주겠다고 소녀에게 접근했던 남자(박광정 役)도 결국은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소녀를 이용하려 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소녀에게 덮어씌워, 성취되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를 소녀를 통해 해소하려 했다.
들판에서 소녀를 강간했던 사내(명계남 役)는 뻔뻔스럽게도 소녀를 도와주는 아량을 베풀어 준다. 자신이 강간을 했다는 죄책감에서였는지, 강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를 가엾게 보는 최소한의 인간적 양심은 남아 있다는 표시였는지, 그는 그녀를 목포댁이라는 대폿집에 맡기게 된다.
목포댁은 같은 여성으로써 소녀에게 성적이거나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소녀를 잘 돌보아 주고 가엾게 여기긴 하지만, 그녀 또한 다른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소녀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초반의 만남에서 소녀에게 가장 폭력적이었던 인부 장만이, 나중에 가서는 그녀를 가장 깊이 이해 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꽃잎으로 상징화 된 소녀, 소녀로 상징화 된 광주
영화는 어리고 약한 소녀를 내세워서 거대한 공권력에 짓밟히고 국가 폭력에 유린당한 당시의 광주 시민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거대한 국가폭력에 희생되어 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소녀를 통해서, 당시 민주화 운동에 희생됐던 시민들이 어떠했는가 하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눈앞에서 엄마를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고, 구타당하는 광경을 목격한 소녀는 미쳐버렸다. 사람들은 소녀를 보고 미쳤다고들 하지만, 그런 사건을 보고도 미치기 보다는 외면해 버리며 자기합리화 시켰을 다른 인물들이야말로, 정말로 비정상적인 사람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런 소녀를 이해하게 된 인부 장은, 종국에 가선 결국 소녀처럼 미쳐버린다. 그가 미치게 된 원인은 단순히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소녀에 대한 연민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녀를 통해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녀가 당했을 일들을 알게 된 그는 그 사실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영화 제목이 ‘꽃잎’인 것은 폭력에 짓밟힌 소녀의 연약한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제목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런 점에서는 너무 연약하게 그녀와 광주의 모습을 그린 게 아닐까 한다. 굳이
미쳐버린 소녀와 한쪽 다리를 저는 막벌이 일꾼 인부의 관계를 통해 비극적인 시대상을 그려낸 영화 ‘꽃잎’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하고 무거웠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통해서 미흡하나마 잘 알지 못했던 과거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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