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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우울하다. 영화는 효섭, 동우, 민재, 보경 각각 네 명의 인물들을 하루 동안 추적하는데, 화면에 담긴 그들의 하루는 그들 삶 전부의 모습을 파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무미건조하고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네들의 나약한 모습은, 바로 그 나약함 때문에 비겁하고 치사함을 넘어서서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영화는 네 명의 인물들을 한 명, 한 명씩 추적해 나간다. 그 인물들 각각의 프레임 속에 담긴 모습들은 하나의 모습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서로 충돌하고 어긋난다.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도 결국 피상적 인간관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모두 다 ‘사랑’을 추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갈망하고, 사랑하기를 욕망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진정으로 ‘이해’받지 못한다. 결국 ‘너는 너고, 나는 나’ 일 뿐, 자신의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은 엄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사소한 이해관계의 득실을 따지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그 관계의 어긋남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들 각자가 서로 진정으로 이해 받지 못하고 파편화된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스스로의 모습 또한 분열되어 있다. 관계의 파편화뿐만 아니라, 존재의 분열까지도 동시에 이중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물들 모두가 하나같이 허점이 있고, 어딘가 뒤틀려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은 우리 주위의 현실 속 인물들의 모습과 똑 닮아 있다.
효섭은 소설가로써 대중들에게도, 동료 문인들-비평가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삼류 소설가다. 후배가 경영하는 출판사에 가서 홀대를 받고 그냥 돌아오기도 하고, 문인들이 모이는 동창회에도 초대받지 못한다. 기어코 가서 참여하기는 하지만, 끝내 그들 사이에서 무시당하고 소외 받는 효섭에게 소설가라는 직업의 명성이나 자부심 따위는 없다. 단지 ‘소설가’라는 딱지가 붙은 그를 연모하는 민재와 만나 관계를 맺긴 하지만, 그에게 그녀는 몇 만원 정도의 용돈을 빌릴 수 있고, 소설가로써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위안할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결혼을 한 유부녀 보경이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의 탈을 쓰고 그녀와 맺는 관계 또한 진정성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다음, 보경의 남편 동우는 심한 결벽증과 소심함을 지닌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는 아내 보경의 외도를 의심해 수시로 집에 전화를 걸어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려 하지만, 그가 확인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 그는 정작, 출장을 간 모텔에 창녀를 불러 같이 관계를 맺는 등 겉과 속의 욕망이 서로 상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관계를 맺고 난 후 콘돔이 찢어졌음을 안 그는, 병적으로 자신의 성기를 씻고 병원엘 간다. 그의 결벽증적인 모습은 모텔에서 창녀와 관계를 맺기 전, 더럽혀진 비위생적인 침대시트를 TV위에 올려놓은 모습에서도 잘 나타난다.
민재는 ‘소설가 선생님’ 효섭을 동경하고 선망하는, ‘소설가의 애인’을 꿈꾸는 스물넷의 처녀다. 아직 철이 덜 든, 바꿔서 이야기 하면 환상을 깨지 못하고 있는 그녀지만, 현실 속 이해관계의 계산은 다른 인물들 그 누구보다도 빠르다. 극장 매표소 직원이라는 자신의 본업 외에, 오락실 기계 음성 녹음 아르바이트를 하고 온 그녀는, 일당이 얼마냐는 동료의 질문에 자신의 수입 7만원을 5만원이라고 속여서 이야기한다. 속물적이면서도 현실감 있는 그녀의 모습이 잘 드러난 대목이다. 영화 속에서 가장 하층민의 삶을 살고, 충분히 뼈 저리게 현실에 부딪치며 세상물정 다 알만한 그녀가 왜 실속 없고 허울과 명분뿐인 ‘선생님’의 환상을 쫓는 것인지, 영화 속 그녀의 그 구차한 거짓말 속에 드러나 있다. 그녀는 치사하게 그런 거짓말을 하며 살아 가는 일상-현실과 상반되면서도 동떨어진, ‘선생님’이라는 달콤한 환상을 쫓았던 것이다. 혹여, 그녀는 ‘소설가의 애인’을 꿈꾸었던 게 아니라, ‘소설가’를 꿈꾸던 소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녀의 환상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민재는 ‘선생님’의 생일에 선물과 생일 케익을 들고 효섭을 찾아가지만, 보경과의 시간을 방해 받아 화가 난 효섭이 그녀에게 들려주는 말은 “유치와 순수도 구별 못하는 똥” 이라는 모욕적인 폭언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보경은, 나머지 인물들 보다는 일상 생활 속에서 덜 구차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녀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유부녀라는 점에서 다른 인물들보다 어쩌면 가장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남편이 가지고 있던 사진과, 사진관에 걸려있던 사진 속 단란한 세 가족의 모습은, 지금은 소원해진 동우와 보경과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영화 내내 아이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과거의 사진 속에는 있으나, 현재에는 부재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서, 아이의 부재로 인해서 해체되어 버린 그들 가정의 모습이 나타난다.
각각의 인물들은 사랑-섹스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려 한다. 섹스 도중 나누는 인물들 간의 대사를 통해 서로 간의 심리 관계와, 그들의 분열된-불완전한 관계들이 속속들이 폭로된다.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보경에게 “남편이랑 섹스 하니?” 라고 묻는 효섭의 졸렬함. 또한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아내인 보경이 결코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내 꺼 라고 말해줘” 하고 외친다. 보경은 “당신 꺼 예요” 라고 대답하지만, 그 말 자체로써 이미 보경이 효섭의 소유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효섭에게 심한 모욕을 받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자신을 좋아하는 민수와 함께 잠자리를 하는 민재는, 민수에게 “날 가지니까 좋니?”하고 묻는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민수의 말에 “내 눈을 보고 얘기 해” 라며 그 진정성을 확인하기 까지 한다. 정작 그녀는 민수를 사랑하지 않지만, 효섭에게 받은 상처를 효섭을 대신해서 자신을 좋아해주는 민수에게서 치유해보려는 그녀의 나약하고 이기적인 성격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창녀와의 섹스로 성병에 걸려서 돌아온 동우는 아내 보경을 반강제적으로 범하면서 “넌 깨끗한 여자야” 라고 내뱉는다. 모든 여자를 성녀 아니면 창녀로 보는 동우의 이분법적인 시선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아내에게 성병을 옮겨 놓고 있는 동우 자신은 聖일까, 娼일까……?
그들 모두 사랑과 욕망, 욕정이 서로 얽히고 설켜 한데 어우러지고 뒤범벅 된 감정으로 상대방과 잠자리를 하고, 그 속에서 무언가 진실된 의미를 찾아보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어떤 ‘의미’를 찾았을지는 의문이다. 방향성과 의식을 상실한 채 분열된 자아를 사랑이라는 허상으로 어떻게든 메꾸어 보려는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민재를 짝사랑하며 그녀에게 집착하는 민수와, 소설가라는 환상을 쫓고 효섭을 따르는 민재, 불륜관계에 놓인 두 남녀 효섭과 보경, 그러한 아내를 의심하고 속박하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욕망은 이기지 못하고 창녀와 잠자리를 가지는 동우. 그들의 비정상적이고 일그러진, 비틀린 사랑의 모습은, 비틀린 시대에 비틀린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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