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애란 (문학과지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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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한 생활

▒ 학원은 2년 정도 다녔다. 그사이 나는 바이엘 두 권을 떼고, 체르니와 하농에 입문했다. 체르니란 말은 이국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아서, 돼지비계나 단무지라는 말과는 다른 울림을 주었다. 나는 체르니를 배우고 싶기보단 체르니란 말이 갖고 싶었다.


침이 고인다

▒ 그녀는 자신이 아침마다 일어나는 데 필요한 것 중 하나가 결심이 아닌 '주저'라는 걸 알고 있다. 그 주저의 순간, 자신에게도 삶에 대한 선택권이 약간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는 것도.


자오선을 지나갈 때

▒ 시험을 준비하며 여러 노력을 했다. 한번은 인터넷을 뒤져 대기업 인사과장이 올려놓은 모범 답안을 정독했다. '서류는 일단 자기소개서를 잘 써야 한다'며 시작되는 글이었다. 그런데 모범 답안 작성자는 자기소개서를 잘 쓴 게 아니라 인생 자체가 잘 씌어 있었다.

▒ 2005년 가을. 사람들 틈에 끼어 서울의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량진의 이름을 생각했다. 다리 량(梁) 자와 나루터 진(津) 자가 동시에 들어간 곳. 1999년 내가 지나가는 곳이라 믿었던 곳.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곳. 하지만 그곳이 정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7년이 지난 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 걸까.



해설
나만의 방, 그 우주 지리학 - 이광호

▒ 이제는 보통의 기준으로 성탄절 데이트를 즐길 수 있게 된 이 연인들에게도 서울은 연인들의 방을 내어주지 않는다. 성탄절은 방 없는 연인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근사한 데이트와 섹스'라는 성탄절 연인들의 메뉴얼은 이미 그들에게 강박과 상처가 되었다. '좀 사는 것처럼 살기 위해' 산다는 것은 얼마나 빤한가? 하지만 또 얼마나 어려운가? 성탄절 머리 위에 있던 선물이 티브이에서처럼 근사하게 포장되어 있지 않고 "항상 까만 봉다리 속에 들어 있"었던 것처럼, '역병'처럼 돌아온 크리스마스는 '방'을 둘러싼 생의 비루함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연인들의 방은 그곳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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