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감독 송해성 (2006 / 한국)
출연 강동원, 이나영, 윤여정, 강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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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유정과 윤수는 닮아 있다. 궁지에 몰려서 고양이를 물려고 하는 쥐처럼, 그들도 세상을 향해 사납게 대항한다. 하지만, 그들의 거친 반항의 모습에는 어딘지 모르게 비애의 냄새가 짙게 깔려 있다. 고아로 자라나 자연스레 험난한 성장배경을 거쳤으리라 추측되는 윤수보다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만 자랐을 것 같은 유정의 경우가 평탄한 현재의 생활과 대비되어 그 비애가 더 강하게 부각된다.


 


내면의 동질성
: 모성에 대한 트라우마 공유


 전혀 다를 것만 같은 그 둘의 공통점은
, 우선 어렸을 적 모성으로부터의 배신의 기억이다. 고아원에서 뛰쳐나와 생모를 찾아갔지만,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은 나도 좀 살자라는 냉담하고 무책임한 회피성 대답이었던 윤수의 상처. 그리고 15살 때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해 어머니에게 그 아픔을 호소했으나, 돌아오는 건 계집애가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 입 다물어라는 말이었던 유정. 다른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모성의 사랑의 부재를 겪은 두 인물은 성장기에 남들과는 다른 의식의 굴절을 겪게 된다. 그 근원적 아픔은 치유되지 못하고 그들에게 트라우마
로 남게 된다. 그 상처는 두 인물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 두 사람을 계속해서 세상과 대치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변 세상과 융화, 혹은 조화되지 못하고 표면을 떠도는 주변인의 삶을 살게 된다.

길바닥 인생을 전전하며 하층민의 삶을 살던 윤수는 말 그대로 세상 의 삶을 살았다. 윤수의 삶은 사랑하는 여자의 수술비 200만원을 마련하지 못해서 강도 짓까지 결심 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삶이다. 그에 반해 대학 교수직까지 취미로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유정의 삶은 겉으로는 평탄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끝없이 가족과 대치한다. 감기만 걸려도 병원에 입원하는 엄마의 건강에 대한 지나친 염려를 조롱하고,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의 기일에 절을 하는 등 가족에 대한 적대감과 반항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엄마를 용서하지 못한 그녀는 그런 식으로 생활 속에서의 탈선들을 일삼는다.

영화는 끝없이 가족과 갈등하는 유정의 모습을 통해서 부유하고 부족함 없는 가족이지만, 가족 내의 성폭력 문제를 쉬쉬하며 덮어버리고 마는 중산층 가정의 허위와 위선을 사정없이 찌르고 파헤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보호받아야 할 어머니로부터의 배신이 유정에게는 더 컸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15살 때의 기억이 없었다면, 그녀도 여느 다른 중산층집 자녀들처럼 부모의 부에 대해 만족을 느끼고 그 만족감을 마음껏 누리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자살충동은 역설적으로 표출된 生의 의지

  그 다음으로 들 수 있는 유정과 윤수의 공통점은 죽음에 대해 달관한 모습을 보이는 그들의 태도이다. 물론, 앞서 지적한 모성에 대한 상처와 그로 인해 세상의 겉을 맴도는 그들의 삶이 주요한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유정은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며 발악하고 있고, 윤수 또한 첫 면회를 온 모니카 수녀에게 자기 좀 빨리 죽여달라고 안달이다.

하지만 조금만 뒤집어서 그들의 말을 해석해보면 죽고 싶다는 건 그 무엇보다도 강한 살고 싶다는 삶에의 의지가 담긴 말이다. 유정의 엄마와 가족에 대한 반항도 어떻게 보면 그때의 그 사랑 받지 못한 상처를 보상받으려는 보상심리 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랑과 관심을 끌기 위해서 일부러 말썽을 피우는 아이처럼, 나 좀 봐달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녀의 외침들은 자칫, 내면의 트라우마를 감추기 위한 허세와 허영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윤수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는 누구보다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렸을 적부터 몸소 부딪히며 살아온 잡초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영화 속 윤수의 배역을 맡은 배우가 고운 꽃미남으로 대표되는 배우 강동원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 그의 잡초 같은 끈질긴 삶을 향한 욕망과, 제대로 살고 싶다는 욕구가 좌초되었을 때,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내뱉던 나 좀 빨리 죽여주소의 이면에는 그런 그늘을 엿볼 수 있다.



 
플롯의 부자연스런 전개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윤수의 경우 갑작스레 삶에 대해 달관된 태도를 보이는 모습이 내게는 작위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윤수가 건강하고 바람직한 삶을 욕망하게 된 근원적인 모태였던 여자친구의 존재를 상기해보면 더욱 그렇다.

자궁 외 임신으로 당장 수술비가 급한 윤수 여자친구의 존재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녀는 그렇게 수술비를 구하지 못해서 죽게 된 것일까? 또한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광고 카피처럼, 사람 마음은 항상 유동적이라고 하지만, 그녀 때문에 범죄를 결심할 정도로 사랑했던 여자친구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새롭게 유정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도 뭔가 억지스럽다. 윤수에게 잊혀져 버린 윤수 여자친구의 존재는, 나중에 있을 그들의 사랑을 위해서 억지로 끼워 맞춘 조각 같아서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물론, 영화는 처음부터 유정과 윤수의 사랑이라는 목적으로 나아갈 것임을 암시했고, 또 그렇게 이야기는 전개됐다.

영화 속 캐릭터 비중을 배분하는데 있어서 부자연스러움을 느낀 건 윤수 여자친구만이 아니다.  또 다른 한 사람, 모니카 수녀의 존재를 들 수 있는데, 그녀 또한 영화 초반 유정의 고모라는 역할과 교도소 수녀라는 역할을 이중으로 수행하며 유정과 윤수의 만남을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그녀의 역할은 거기서 끝난다. 중 · 후반부 전개 흐름상 다시 한 번 더 등장할 법한 모니카 수녀님은, 영화 밖 실제 배우 윤여정이 정말 아팠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 속에선 그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유정과 윤수의 만남을 전면적으로 극대화해서 부각시키려 했던 감독의 의도로 인해서, 작품 속 전체적인 인물들 간 비중의 배분이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캐릭터간 비중이 자연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플롯 전개 흐름도 어긋났다는 인상을 준다. 한마디로,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인위적일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사랑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들의 사랑에 관해서도 딴지를 걸고 싶다. 윤수가 먼저 유정의 손목에 난 상흔을 보고 그녀의 감춰진 아픔을 알아챘고, 유정도 차근차근 풀어나간 윤수의 고백으로 그들은 서로의 상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연민과 동정, 동질감 등을 느꼈을 것이라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이 꼭 사랑에 빠지라는 법은 없다. 굳이, 그 감정들을 사랑이라는 타이틀로 포장해야 했을까.

영화를 보는 동안 사형제도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뤘던 또 다른 영화 데드 맨 워킹이 생각났다. 각 영화의 특색이 다를 수 밖에 없음을 전제하고서 라도, 애써 로맨스를 과장하지도, 포장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현실적으로 그려나간 그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사랑을 갖다 붙여 억지 감동을 짜내려는(그 위에 사형제도의 문제점은 단지 양념처럼 곁들였을 뿐인) ‘우행시의 스토리는 내게 반감만을 주었을 뿐이다.

위에서 열거했던 두 사람의 공통점이 아닌 차이점을 든다면, 표면적으로 가장 크게 드러나는 부분은 그들의 빈부격차와 사회적 지위 따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그 두 사람은 사랑하고 공감했다는 점을 부각 시키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극적인 감동을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위와 같은 장치들 설정했을 것이다. ‘우행시는 내게 식상하고 구태의연한 스토리로 다가오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관객의 감정에 호소력 있게 다가가 어느 시대의 어느 대중들에게나 먹혀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보여진다.

원작을 접해보지 못해서 알 수는 없지만, 감독이 원작에서의 두 사람간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작에서의 매끄러운 전개에도 불구하고, 조잡한 연출력이 깃들여진다면 원작만큼의 빛을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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