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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 집단과 하나가 되는 한에서만 개체는 안전하다. 그리하여 부조리한 실존들은 괴상한 집단주의 속에서만 구원을 찾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필사적으로 자기를 집단과 동일시하려 한다. 그 집단은 작게는 교실 안의 패거리, 크게는 국가와 민족일 수 있다. 집단과 동일시에 실패하는 자는 공동체의 성스러움을 지키기 위한 희생양이 된다. 그러다가 희생자가 사라지면? 문제없다. 개별자들은 집단 속에서 기어이 또 하나의 '모난' 놈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희생양이 선택되면, 적어도 그가 존재하는 동안은 개별자들은 다시 안심하고 살아간다. 그리하여 '전체 빼기 하나'의 화해와 평화. 보편적 카오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이너스 1'의 제의(祭儀).
▒ 거시적 차원에서 거룩하게 이루어지는 '전체 빼기 하나'의 희생양 제의. 다르게 생각하는 자를 배제할수록 '공동체'는 순수해지고 '전체'의 동질성은 강화된다. 불순물을 배제할수록 공동체는 신성해지고, 이 신성함이 휘두르는 폭력은 가볍게 인간적 규모를 넘어선다. 성스러운 아우슈비츠의 폭력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화적 폭력이다. 내적 동질성의 강화는 곧 외적 배타성의 강화다. 공동체가 정화되어 더 이상 이물질이 없을 때, 그리하여 더 이상 내부에서 적을 찾아볼 수 없을 때, 폭력은 이제 '세계사적 사건'을 저지르러 밖으로 뻗어나간ㄷ. "아리안족은 정복자로서 열등한 인간들을 복종시키고 자신의 명령과 의지와 목적을 위해 그들의 실천적 행위를 규제했다."(아돌프 히틀러)
자유
▒ 진짜 자유주의자라면, '자유'라는 말로 경제적 자유 이상의 것을 의미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교양이다. 또 시장을 만능 '해결'로 보는 수준을 넘어 동시에 그것을 '문제'로 볼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평등을 자유와 대립시켜놓고 '골라, 골라' 야바위를 하는 수준을 넘어 '정의'라는 이름으로 평등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게 현대적 자유주의의 수준이다.
▒ 흔히 '자유=민주'라 생각하나 실은 양자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함축한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경쟁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평등 없는 순수한 자유란 현실 속에선 결국 "다리 밑에서 잠잘 자유"를 의미하게 된다. 나아가 평등 없는 자유가 보수주의와 결합하여 정치적 자유마저 포기할 때 나치즘과 같은 또 하나의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 한편, '민주'는 본질적으로 평등의 이념이다. 경제적 평등의 요구가 나아가 자유를 억누르며 관철될 때 공산주의라는 극단이 성립한다.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라고 자유와 민주를 붙여서 말할 때, 이는 위에서 말한 극단들을 피하기 위함이리라. 자유와 민주는 서로 보완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요소가 다양한 형태로 결합하여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만들어내야 한다.
처벌
▒ 미셸 푸코는 이 부분을 파고든다. 바로크 시대의 잔인한 공개 처형이 금고형으로 바뀌어가는 휴머니즘의 이면에는 인간을 길들여 사회 질서에 순응시키려는 권력의 전략이 숨어 있다는 거다. 가령 '보복에서 치료'로. 이 휴머니즘화 과정에서 형벌은 점차 그 잔인성을 벗어버리나, 이 과정의 이면에서 우리는 범죄자를 둘러싼 지식 권력의 교체를 본다. 가령 봉건적 '보복론'의 바탕을 이루는 지식 권력은 신학(윤리학), '예방론'을 낳게 한 지식 권력은 당시에 유행하던 '쾌와 불쾌'에 관한 심리학, 그리고 '재사회화론'의 이론적 토대는 사회학, 정신의학, 정신분석학 등이었다. 이론들이 교체되면서 이어져온 법철학의 역사. 어쩌면 이는 범죄자를 관리할 권리를 둘러싸고 벌이는 지식 권력들 사이의 경쟁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성
▒ 중세처럼 특정 종교집단에만 타당한 도덕을 사회일반에 강요하던 시대는 지났다. 아직도 자기의 종교적 신념을 사회 일반이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제시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일단 광신도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공포
▒ 한마디로 레드 콤플렉스는 빨갱이에 대한 공포감이 아니다. 외려 빨갱이 잡는 극성스런 반공 투사들에 대한 공포에 가깝다. 말하자면 언제라도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반공주의적 언행을 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즉 타인을 향해 "나는 빨갱이가 아니에요."라고 고백을 시끄럽게 하는 방식. 그것도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공격적인 방식의 고백. 그것이 레드 콤플렉스다.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은 사고의 유연서응ㄹ 잃어버리고 도미노 속의 블록이 되어 연쇄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하여 벌것 아닌 일이 결국에는 핵분열과 같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사회가 발칵 뒤집히게 되는 것이다.
정체성
▒ 군가산점 위헌 판결이 내려졌을 때, 내가 의아했던 것은 왜 그 고귀한 분노가 정작 그 판결을 내린 남자들, 즉 대법관들로 향하지 않고, 엉뚱하게 그 소송을 낸 여성들의 출신학교 사이트로 몰렸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또 자기 삶에 직접 · 간접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칠 법령들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국회에서 통과되는 판에, 하필 군필자 중의 극히 일부와 관계 있는 군가산점 문제에 왜들 그렇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인지, 이 뜨거운 연대의식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이런 것이다. 즉 군가산점을 둘러싼 논쟁이 그토록 뜨거웠던 것은 그것이 '예비역'으로서 남성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별거 아닌 문제를 놓고 남성들이 그렇게 신속하게 통일전선을 구축했던 것이리라.
우리는 살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 수많은 정체성 중에서 왜 하필 동대장님의 부르심만이 신성한 걸까? '예비역'이라는 정체성은 기껏해야 일생에 한두 달 정도만 자기를 규정할 뿐이다. 그런데 왜들 자신을 그렇게 철저하게 '예비역'과 동일시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이제 몸뚱이만도 아니라 정신도 제대를 해야 하지 않을까? 군사문화가 사회 속에서 유지되는 것은 군을 떠나서도 정신은 여전히 군이라는 특수 사회의 원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도대체 자기가 원해서 가진 것도 아닌 이 강요된 정체성에 한국 남성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집요하게 애착을 느끼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 어느 사회에서나 교육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 먼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즉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지적 능력을 재생산 하는 것. 둘째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즉 특정 생산관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2세들의 머리 속에 주입하여 그 관계를 재생산하는 것. <국민교육헌장>은 정확하게 이 두 요소만 담고 있다. 여기서 첫번째는 기술적 담론의 대상, 두번재는 종종 정치적 담론의 대상이 된다. 가령 일본의 역사교과서 파동, 한국의 전교조나 일본 일교조에 대한 마녀사냥을 생각해보라. 지배 세력에게 "참교육"은 권력의 원활한 재생산을 방해하는 골치 덩어리일 뿐이다. 그래선지 <월간조선>에서는 "열린교육은 국가를 깡통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 공적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 윤리나 규칙을 지키는 사람은 도태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이런 사회의 경쟁은 글자 그대로 생물학적 '생존 경쟁',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민중이 짜낸 지혜가 바로 '패거리 문화'다. 한국의 공적 영역은 패거리에 의해 움직인다. 기업은 혈연을 기반으로 한 족벌 체제로 운영되고, 정치는 학연과 지연에 의해 결정된다.
▒ 주체성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집단과의 동일시 속에서만 자아실현을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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