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핵심

저자
조셉 콘래드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09-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프랜시스 코플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 소설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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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부터 나는 일에 착수했다네. 이 말은 그 주재소에 등을 돌렸다는 뜻이야. 측면들을 딛고 설 수 있을 것 같았어. 그 삶의 구원적 측면들을 딛고 설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러나 우리는 이따금 주위를 돌아다보면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내가 그 주재소를 바라보기라도 하면 직원들이 뜰에 비치는 햇볕 속에서 아무런 목표도 없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보였어. 나는 그게 모두 무엇을 뜻하느냐고 내 자신에게 물어보곤 했지. 그들은 그 우습게 생긴 기다란 막대를 손에 들고 여기 저기 헤매고 다녔는데, 그건 마치 신앙을 상실한 일단의 순례자들이 어떤 썩은 울타리 속에서 마술에 걸려 있는 것 같았어. <상아>라고 하는 낱말이 허공에서 울리고 있었어. 그 말은 속삭여지기도 했고 또 더러는 한숨 속에 섞여 있기도 했지. 자네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그 사람들이 상아를 향해 기도라도 드리고 있나보다고 생각했을 거야. 백치 같은 탐욕의 색채가 마치 시체 썩는 냄새가 확 풍기듯이 모든 것 속에 번지고 있었다네.

 

▒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단 말인가? 우리가 그 말없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인가? 말을 할 줄 모르고 아마 귀까지 먹었음에 틀림없는 그 세계가 실로 엄청나게 거대하다는 것을 나는 절감하고 있었어.

 

▒ 자네들은 그 자를 상상할 수 있는가? 자네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가? 도대체 자네들은 무엇이건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나는 자네들에게 마치 어떤 꿈 이야기를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다네. 이건 헛된 노력일 수밖에 없지. 왜냐하면 세상에 그 어떤 꿈 이야기도 꿈속에서 느낀 것을 그대로 옮길 수가 없기 때문이야. 발버둥질치는 반항의 떨림 속에 혼재하는 그 부조리함, 놀라움 및 당혹감이라든가, 믿을 수 없는 것들의 세계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이 바로 꿈의 본질이겠지만 이런 것을 어떻게 이야기 속에 옮길 수 있겠는가……

 

▒ ... 그래서 그들은 나란히 서서 앞으로 몸을 숙인 채 언덕을 올라가며 서로 길이가 다른 자기네의 우스꽝스런 그림자를 힘들게 끌고 있었지. 그들의 뒤에서 그 두 그림자는 기다랗게 자란 풀 위로 천천히 끌려가면서도 풀잎을 하나도 꺾지는 못했어.

 

▒ 그런 종류의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단순히 표면적인 일들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다보면, 표면 뒤의 실체, 바로 그 실체는 사라지고 만다네. 내면의 진실은 감추어져 있는데, 그건 다행이지, 다행이야. 그러나 그것이 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사뭇 느낄 수는 있었지. 그 신비로운 정적이 내가 벌이는 보잘것 없는 짓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자주 느낄 수 있었단 말일세.

 

▒ 내게 가장 괴로웠던 건 그들 또한 비인간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는 바로 그 생각이었어. 그런 생각은 서서히 떠오르는 법이지. 그들은 소리지르며 깡충깡충 뛰거니 제자리에서 빙빙 돌거니 하면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어. 그러나 그 광경을 바라보던 우리를 몸서리치게 한 것은 그들 또한 우리들처럼 인간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 야성적이고 열정적인 소동이 우리와는 먼 친족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어. 그건 흉측한 생각이지. 아무렴, 흉측한 생각이야. 하지만 우리가 참으로 용감한 인간이라면 그 무섭게도 솔직한 소동에 대해 우리가 마음속으로 희미하게나마 맞장구치는 흔적이 있다든가, 우리가 태초의 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소동 속에 들ㄹ어 있는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생각이 든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그걸 인정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어. 인간의 마음은 무슨 생각이든 할 수 있는 법이야. 왜냐하면 모든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과거까지 그 속에 모조리 들어 있기 때문이야.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기쁨, 두려움, 슬픔, 헌신, 용기, 분노가 있겠지만,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진실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옷을 벗어버린 진실이지. 바보들이야 입을 벌리고 몸을 떨고 있겠지만, 용감한 인간이라면 진실을 알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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