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과 국회의원도 야구보다 위대하지는 못했다. 아니, 애당초 더 위대할 수 없다. 정치와는 달리, 야구에는 원칙과 룰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어차피 인생은, 눈을 감으면 꿈이다.
▒ 결론은 프로였다.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바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
결국 문제는 '평범'의 기준에 관한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평범인가? 거기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1980년대의 세상은 3위 MBC와 4위 해태 타이거즈를 하나로 꽉 묶어주는 새로운 용어 하나를 만들어낸다.
중산층
바로 중산층이다. 이 파워풀한 단어는, 그 후 세상을 바꿔나가는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작용한다. 이 하나의 단어로 인해, 이제 확실히 도표의 3, 4위가 새로운 평범의 기준이 된 것이다. 무진장 노력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남들 사는 만큼 사는 거죠."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죠."
라고 말하는 이상한 세상이 온 것이다.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어수선한 마음에 창문을 열어보니 확실히 세상의 공기가 달라진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프로야구에 뛰어든 아마추어 야구팀 삼미였고, 나는 이 프로의 세상에서 아마추어를 사랑한 죄로 멸시와 조롱을 받았던 것이다. 분명 누군가가 그해의 프로야구를 창조했고, 프로야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열광하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배후에서, 프로야구는 산 안드레아스 단층을 파괴하고, 그것을 다시 재건했으며 빛보다 빠른 속도로 지구를 역행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지금 저것은 내가 자라온 세상, 내가 알고 있던 산 안드레아스 단층이 아니었다. 분명 세상은 그대로이나
아마추어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루이스의 죽음을 알아차린 슈퍼맨처럼 나는 가슴이 터질 듯 슬펐지만, 나에겐 저 세상을 역행시킬 만한 능력이 없었다. 나는 슈퍼맨이 아니었고, 렉스 루더와 같은 대악당도 되지 못했으며, 다른 무엇보다, 나는 아마추어였다. 즉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던 것이다.
▒ 어느 날 운동권의 리더들이 모두 일류대 소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혁명에 있어서도 소속이 중요했던 것이다. 꽤 복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소속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다시 학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세계에도 지층은 존재하고 있었다!
▒ 이곳에서 나는 '최하위'의 심리적 문신을 지닌 거의 유일한 인간이었다. 모두가 이마에 '일류대'의 문신을 새기며 즐거워하고 있을 때 나의 이마에는 이미 '삼미'라는 두 글자가 '궁서체' 내지는 '양재튼튼체'의 서체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글씨의 컬러는 빨강, 아무튼 그런 느낌.
▒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적어도 패션과 외모에 관한 한, 나는 김치사발면 속의 동결건조김치와도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물은 붓고, 불려도 그것은 절대 진짜 김치가 되지 않는다.
▒ 사람들이 모두 돼지발정제를 마신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우리도 이미 마신 건지 몰라. 단지 아직 5분이 지나지 않았을 뿐이지. 신정 때 집에서 혈투가 벌어졌어. 유산이 문제였지. 할아버지가 물려준 임야갸…… 졸지에 개발 지역이 되었나봐. 그게 화근이었어. 못 준다, 내놔라. 온갖 욕이 오가고 주먹질이 오갔지. 어머니가…… 싸움을 말리다 쓰러지셨어…… 막내삼촌은 눈을 다치고…… 결국 재판을 할 모양이야. 이해할 수 없는 건 우리나 삼촌이나 다들 먹고 살 만한 집들이란 거야. 실은 남부럽잖은 집들이지…… 난 말리지도 않았어. 다들 미쳤다고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니까. 그 눈빛들은…… 직접 보지 않고선 설명할 길이 없어…… 없다구. 그런데 세상을 둘러보니 다들 그런거야. 다들! 다들 돼지발정제를 마신 것처럼 땀을 흘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어. 아무래도 놈들이 원하는 건 돈과의 교미가 아닌가 싶어. 이미 마신 이상은…… 그 끝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거지. 어쩌면 우리가 대학을 간 것도 다 그걸 마셨기 때문이야. 지금은 느끼지 못해도 좀더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되겠지. 여하튼 땀이…… 나고 숨소리가 거칠어질테니까. 내가 왜 이러지? 난 결백해…… 하며 똑같은 짓을 하게 될 거라구. 분명해. 그래, 분명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걸 먹였어. 우리가 마셔온 물에, 우리가 먹어온 밥에, 우리가 읽는 책에, 우리가 받는 교육에, 우리가 보는 방송에, 우리가 열광하는 야구 경기에, 우리의 부모에게, 이웃에게, 나, 너, 우리, 대한민국에게…… 놈은 차곡차곡 그 약을 타온 거야. 너도 명심해 그 5분이 지나고 나면, 우리도 어떤 인간이 되어 있을지 몰라……
▒ 마음이 약해질 때면, 결혼 전의 신입 시절을 떠올렸다. 인천의 집에서 전철로 출근하던, 또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돌아가던─그 매일매일의 러시아워와 신도림역을, 나는 생각했다. 삶은 단순하다. 삶은 절대로, 복잡한 것이 아니다. 러시아워 때의 신도림역에 가보면, 누구나 삶이 무엇인지, 뼈져리게 알 수 있다. 가봐, 다시 돌아가기 싫지? 내 속의 <나>가 소리 질렀다. 자, 일어, 나자. <나> 밖의 내가 푸시맨처럼 <나>를 떠미는 완력을, 나는 느꼈다. 언제나, 느끼곤, 했다. 그해의 6월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문이 막 닫히려는, 신도림의 전철처럼. 그렇게 급박하게, 그러나 정지한 것처럼 선명하게.
▒ 그 <자신의 야구>가 뭔데?
그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야. 그것이 바로 삼미가 완성한 <자신의 야구>지. 우승을 목표로 한 다른 팀들로선 절대 완성할 수 없는─끊임없고 부단한 <야구를 통한 자기수양>의 결과야.
뭐야, 너무 쉽잖아?
틀렸어! 그건 그래서 가장 힘든 <야구>야. 이 <프로의 세계>에서 가장 힘든 <야구>인 것이지. 왜? 이 세계는 언제나 선수들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야. 어이, 잘하는데.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 누군 이번에 어떤 팀으로 옮겨갔대. 연봉이 얼마래. 열심히 해. 넌 연봉이 얼마지? 아냐, 넌 할 수 있어. 그걸 놓치다니! 방출된 사람들이 뭘 하며 사는지 아니? 넌 주무기가 뭐야? 도루해, 도루! 이봐, 팀을 위해 사생활을 포기하는 건 당연하잖아! 밤중에 연습이라, 보기 좋은데!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cerpt] 제8요일 - 마렉 플라스코 (0) | 2008.11.23 |
---|---|
[article] 장원삼 "프로가 비즈니스인 걸 알았다" (0) | 2008.11.21 |
[excerpt] B급 좌파 - 김규항 (0) | 2008.11.15 |
[article] ‘히어로’ 팔아 연명하는 히어로즈 (0) | 2008.11.14 |
[excerpt] 홀림 - 성석제 (0) | 2008.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