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erpt]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 최장집

최장집: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최장집 (생각의나무, 2008년) 상세보기

▒ 우리가 갈등과 그 타협의 과정을 정치라고 정의할 때, 민주주의는 공정하고 주기적인 선거와 이에 참여하는 정당 간 경쟁을 통해 이러한 갈등을 표출하고 타협하고 해소하는 정치체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운동권의 중요한 언술로 나타나는 "초심으로 돌아가자"라든가 "운동 본연의 도덕성과 연대성을 회복하자"라는 구호들은 민주화최대동맹의 해체를 부정하거나 저지하는, 즉 과거의 것을 되살리려 하거나 지키려한다는 의미에서 퇴행적 성격을 갖는다.


▒ 혁명적 방법을 통해 총체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단기적, 전투적, 급진적 수단에 의존해 일거에 변화를 획책하는 행위 혹은 경향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운동의 정조는 정당정치의 특징들, 즉 더디고, 제한적이며, 불만족스런 타협을 수반하는 정치과정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진보파들과 민노당과 같은 진보정당 내부에서 선거나 대의제 그 자체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정서가 어렵지 않게 목격되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민노당과 같은 진보적 군소정당들이 정부구조, 선거제도, 정당법과 같은 정치제도나 그 변화가 자신들의 존립 및 발전과 관련해 사활이 걸린 문제임에도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정치로부터 도피하여 일종의 반체제적 운동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성 같은 것을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양극화를 말하고 사회복지를 말하고 약자에 대한 보호를 말할 때, 말하는 자는 언제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스로를 온정을 베푸는 자혜로운 엘리트로 생각한다. 민주적 시민이 문제를 보는 방식은, 보편적 가치를 향유해야 할 사람들 스스로가 정치과정에 참여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관점에 바탕을 둔다.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일들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 한국에서 지역정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 또는 언어-문화적 균열을 대표하는 정당이라기보다는 반대로 역사, 문화, 언어 등에 있어 고도로 동질적인 사회에서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특정 지역 출신의 정치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균열이 형성된 최근의 정치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정당에서는, 대통령선거를 전후로 한 시기에 들어서면서 선거 경쟁력을 갖는 인물을 중심으로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 일어나고 예외 없이 정당의 당명이 바뀌는 등의 변화가 뒤따랐다. 거의 선거 때마다 당명이 바뀌기 때문에 정당의 이름을 말하기보다, 차라리 그 앞에 당의 지도자 이름을 따라 김대중 정당, 김영삼 정당, 노무현 정당이라 하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할 때가 많다. 그래서 이들 정당이 집권했을 때 정부의 이름도 민주당 정부, 열린우리당 정부가 아니라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로 불리게 된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