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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눈에 연기로 비치는 것이 나로서는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고, 남의 눈에 자연스러운 나로 비치는 것이 곧 연기라는 메커니즘을 그 무렵부터 나는 희미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 내가 인생에 맞서는 태도는 그즈음부터 이러했다. 너무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것. 너무도 사전의 공상으로 지나치게 꾸며진 것에서는 결국 도망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 한번은 그가 무슨 변덕이 났는지 내가 우리 나이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구경하러 온 적이 있었다. 나는 대충 애매한 미소로 그 책을 감춰버렸다. 수치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서적 따위에 흥미를 갖는 것, 그러다가 어떤 어설픈 구석을 내보이는 것, 그가 자신의 무의식적인 완전성을 싫어하게 되는 것, 그런 갖가지 예측이 나로서는 괴로웠기 때문이다. 이 어부가 이오니아의 고향 땅을 잊어버릴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 공습을 남들보다 훨씬 무서워하면서 동시에 나는 어떤 달콤한 기대로 죽음을 기다려 마지않았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내게는 미래가 너무나 버거웠던 것이다. 인생은 처음부터 의무관념으로 나를 조여왔다. 내가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잘 알면서도 인생은 나를 의무 불이행이라는 이유로 마구 힐책하는 것이었다. 이런 인생을 죽음으로 골탕 먹인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전쟁중에 유행하던 죽음의 교의(敎義)에 나는 관능적으로 공감했다. 내가 만일 '명예로운 전사'를 하게 된다면(그건 참으로 어룰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야말로 풍자적으로 생애를 마감한 것이 되고, 무덤 안에서 내가 지을 미소의 씨앗은 영원히 시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사이렌이 울리면 누구보다도 빨리 방공호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 이따금 나는 눈을 감고 내가 군대에도 공장에도 가지 못하고 집에 남아 미적거리고 있을 때 공습으로 식구가 전멸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이 공상에서는 말할 수 없이 강한 혐오감이 베어나왔다. 일상과 죽음의 관련, 이것만큼 내게 기묘한 혐오감을 주는 것은 없었다. 고양이조차 인간에게 제 죽은 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죽음이 다가오면 자취를 감춘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가족이 끔찍하게 죽은 꼴을 보거나 가족이 내 그런 꼴을 보거나 하는 상상만으로도 가슴팍까지 구토가 치밀었다. 죽음이라는 똑같은 조건이 한 집안을 떠돌고, 죽음을 앞둔 부모나 아들이나 딸이 죽음의 공감을 넘실거리며 서로 주고받을 시선을 생각하면, 나에게는 그것이 완전히 한 가족의 단란한 광경의 지겨운 복제판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타인들 속에서 당당하게 죽고 싶었다. 그것은 밝은 하늘 아래 죽고 싶다고 희구한 아이아스의 그리스적 심경과는 전혀 달랐다. 내가 원한 것은 좀더 천연의 자연적인 자살이었다. 아직 교활한 꾀에 능숙하지 못한 여우처럼 나 잡아가라는 듯 산기슭에서 태평하게 걸어가다가, 자신의 무지로 인해 사냥꾼의 총에 맞는 식의 죽음, 나는 그것을 원했다.
▒ 그렇게 멀리서 도쿄 상공에서 일어나는 공중전을 보았으니 어떻게 적과 우리 편을 구별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벌건 하늘을 배경으로 격추되는 비행기의 자취를 보면 구경하던 이들은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그중에서도 떠들썩한 것은 소년공들이었다. 방공호 여기저기에서 극장처럼 박수와 환성이 울려퍼졌다. 이렇게 멀리서 구경할 때는 떨어지는 비행기가 적의 것이든 우리 것이든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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