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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씨 일가에 대한 처벌을 반대하는 이들은 흔히 자신들을 보수 세력이라 부른다. 그러나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병역을 기피하는 보수 세력이 있다는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보수는 기본 체제를 지키려 든다는 뜻인데 납세와 병역은 체제 유지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들이 보수를 자처하는 것은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몸부림일 뿐, 진정한 보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구조본 팀장회의에서 결정을 내릴 때 적용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였다. 이건희의 이익이 그것이다. 삼성의 이익과 이건희의 이익이 충돌할 때면, 늘 이건희의 이익이 우선이었다. 구조본 팀장들이 기업 경영자가 아니라 이건희의 가신(家臣)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이건희의 가신들이 모인 회의에서 국가적인 문제가 논의됐다면? 황당한 일이다. 이건희의 이익을 기준으로 내려진 결정이 국민 다수에게 도움이 될 리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이 흔했다. 정부와 삼성 사이의 거리는 늘 가까웠고, 구조본 팀장회의는 이건희의 이익을 위해 정부를 요리했다.
삼성 자동차 실패… 결정은 이건희, 책임은 지승림, 손해는 국민
▒ "기획팀의 기안이 실패했다"는 이학수의 말은 사실상 이건희의 결정이 실패했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책임은 기획팀이 뒤집어썼다.
'반도체 기술자' 위에 있는 '비자금 기술자'
▒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구조다. 희생을 치르고 조직에 기여한 사람과 성과를 챙기는 사람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삼성 구조본에서 일해본 사람은 그 이유를 안다. 삼성에서 가장 높은 대우를 받는 사람은 뛰어난 기술을 개발해서 회사의 위상을 높인 사람이 아니다. 이건희, 이재용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대개 회사가 저지른 비리의 공범들이다. 삼성에서는 비리 공범이 돼서 수뇌부와 비밀을 나누는 사이가 돼야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반도체 기술자'보다 '비자금 기술자'가 위에 있는 구조인 셈이다.
'성공한 재벌'은 처벌 못 한다?
▒ 힘없는 사람 한두 명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는 처벌하되, 힘있는 이들이 똘똘 뭉쳐서 오랫동안 조직적으로 저질러 온 범죄는 처벌하지 않는 사법기관을 신뢰할 사람은 없다. 한국의 사법정의는 한때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하는 수준까지 도달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성공한 재벌'의 경제범죄는 처벌하지 못했다. 삼성 비리에 대해 면죄부가 나온 이휴, 경제범죄로 처벌받는다면 그는 '실패한 재벌'이거나 '재벌이 되지 못한 자'가 되는 셈이다. 이런 사례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한 재벌'이 돼라. 그 과정에서 저지른 죄는 절로 사면 받는다"라는 것.
판결이 아니라 배당으로 말하는 법원
▒ 이런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잇는 점이 있따. 법원 수뇌부가 사건 배당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랴 특정 판결을 유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법원 수뇌부가 이끌어내고 싶은 판결이 있다면, 수뇌부가 원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가진 판사를 골라 사건을 배당하면 되는 것이다. 삼성특검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 촛불시위 사건에 대한 가혹한 판결이 모두 이런 식으로 나왔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하는데, 법원은 사건 배당을 통해 말하는 셈이다.
'빨갱이' 낙인보다 무서운 '반(反)기업' 낙인
▒ 삼성에 대한 입장은 재벌 친화적인 우리 사회 주류의 가치관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통한다. 삼성에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는 "나는 반(反) 기업적인 법조인이요"라고 선언한 것과 같다. 그런데 대형 로펌에서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 변호사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재벌 계열 대기업들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로펌들이 규모를 키우고 있는 상황에서는 대기업 사건을 얼마나 수임하느냐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고만고만한 사건만 맡아서는 막대한 인건비를 지출하는 로펌이 수지를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로펌들은 대기업의 낙점을 받기 위해 규모를 키우고, 큰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 대기업 사건에 목을 매게 되는 순환 구조가 생겨난 것이다.
마당발 천국, 서민에겐 지옥
▒ 중요한 결정이 인맥에 좌우되는 비율이 높을수록 결국 재벌을 비롯한 기득권층에게 유리해진다. 이들은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인맥에 접근하기가 쉽다. 반면, 서민들은 아무리 친화력이 뛰어나도 이런 인맥에 다가가기가 어렵다. 인맥을 활용해 이익을 얻는 일은 인간적인 친화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돈이 많거나, 고위 공직을 지냈거나,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일수록 인맥 중심 사회에서 유리하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 많은 사람들이 재벌의 비리를 공개해 봤자 소용없다고 이야기했다. 삼성 비리 관련 재판 결과가 나오자, 이런 목소리에 "역시나"하고 힘이 실렸다. 이들은 말한다. "정의가 이기는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고. "질 게 뻔한 싸움에 뛰어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내 생각은 다르다. 정의가 패배했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의가 이긴다"는 말이 늘 성립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정의가 패배하도록 방치하는 게 옳은 일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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