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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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석원 (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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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과 상실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풍화된다. 어떤 것은 풍화가 되다, 되다 결국엔 마지막 한 줌 가루가 되어 그마저도 바람에 쓸려가지만 또 어떤 것은 종래에도 완전히 다 쓸려가지 않고 최후의 덩어리로 남아 화석이 되기도 한다. 나는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길 바란다. 그래서 내겐 앨범이란 것이 없다. 기록은 내 머릿속에 있는 기억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소멸 직전에 약간의 절차를 기대할 수 있다면 장례를 치르는 동안 영혼이 죽음을 준비하고 세상과 이별할 시간을 가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너무 바빠서, 외국이라 힘들어서,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일들이 있을 거야. 나는 외국 출장 같은 것 한번도 가본 적 없으니까. 너무나 경황이 없겠지. 어쩌면 문자를 보냈는데 '거리가 멀어서' 늦게 오는 걸 수도 있고.'
 A의 노력은 끝없이 계속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그것을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고자 하는 순수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자신이 보통의 존재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불과하다.


▒ 행복 중의 으뜸이 바로 평범한 행복이다.
왜냐하면 삶이, 세상이 우리를 가만 놔두질 않는다.
일상에서 무사히 하루를 보내는 것만 한 행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 당신의 인생은 안타깝다.


▒ 한 명의 사람을 만나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읽거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일과도 같다.

누구든
얼굴에는 살아온 세월이 담기고
모습과 말투, 행동거지로 지금을 알 수 있으니

누군가를 마주한다는 것은 어쩌면
한 사람의 일생을 대하는 것과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 사그라들지 않는 욕망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감당하고 받아들였다고 안도한 순간 다시 욕망이 맹렬하게 또아리를 틀 때, 나는 파고다 공원을 배회하는 불쌍한 노인이 된 듯하다. 그럴 때의 나의 글쓰기란 어쩌면 방황하는 노인의 그것과 같을지 모른다.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면 굳이 그것을 글로써 추상화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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