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꽃-동인문학상수상작품집30회

저자
하성란 지음
출판사
조선일보사 | 1999-06-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반양장본ㅣ302쪽ㅣ210*148mm (A5)책소개 아파트 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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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 - 공선옥

 

▒ 별 하찮은 인간이 다 나를 귀찮게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흔들리는 나. 나는 아무것이나 손에 닿는 것을 꽉 붙잡는다.

 

 

일곱 겹의 침묵 - 박정요

 

▒ 아버지는 날마다 술집을 순례하는 게 중요한 일과였죠. 날마다 새롭게 당신의 현실을 잊고 싶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해가 지면 더욱 헐렁한 껍질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죠. 솟은 어깨 속으로 목은 더욱 움츠러들고 다리는 축구공을 낀 것처럼 굽은 채로요.

 

 

이렇게 정원 딸린 저택 - 백민석

 

▒ wt와 나의 관계처럼, 그의 아버지와 나의 관계도 쉬이 끊어질 만한 것이었다. 피부 아래서 열흘이면 녹아 없어질 가용성 봉합사였다. 사실, wt나 그의 아버지뿐 아니라, 내 삶에 존재하는 관계 대개가 그러하다. 내 몸뚱일 칭칭 휘감고 뻗어나간 관계들은 실은, 가냘프고 쉬이 삭아 사라질 것 투성이다. 사방팔방 뻗어나가며 그것들은 은색으로 멋지게 반짝이지만, 내 피둥피둥 쪄오른 살 밑에서 오래잖아 삭아 없어질 가닥들이 거개인 것이다. 얼마나 잘 삭는지 관계가 끊어져도, 흉터하나 남지 않는다.

 

▒ 어쨌거나 시간이 남아돌지 않게끔 주의해. 그렇잖으면 사람이 망가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경우, 그 시간들은 아랫배에 죄다 와 붙어 버렸다.

 

▒ "어쨌든 무언가 계속되고 있다는 느낌이 필요해."

 wt가 고개를 들곤 중얼거렸다. 난 이걸 육 년뿐만 아니라, 평생 물고 늘어질 참이야. 자기 생에는 연속성에의 감각이 필요하고, 저 한 폭의 캔버스가 그것이라는 얘기였다. 그것은 평생 끊김-단절이 없이 계속-연속될 거란, 채워져 나갈 거란 얘기였다. 내 지나간 시간이 워낙 짧아서 그런가, 내겐 그런 게 없었다. 연속이란 개념이 없다. 무수한 단속점(斷續點)만이 가득하다. 라거 한두 캔에 입 안이 온통 텁텁했다. 소름이 돋았다.

 

▒ 그래, 이런 정원 딸린 저택엔 어떤 사람이 사나 궁금했었다고 했지?

 "의문이 풀렸어?"

 "별로."

 나는 어쨌거나 잔디밭은 밟아 봤으니, 만족한다고 했다. 나는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니까, 라고 답했다. 어렸을 적 가졌던 의문들 대개는, 공소 시효가 지난 사건들처럼 돼버렸다. 해결해도, 손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아주 공손하게, 돌아가 이 저택과 wt 당신에 대해 쓴다고 하더라도 그건, 몇 줄 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내 사랑 나의 鬼神 - 최인석

 

▒ 어느 누구에게도 고백할 수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사랑, 나의 사랑은 비밀이요 함정이요 덫이었다. 나의 연인은 한순간도 내가 자신의 인력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 인력권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허락받은 적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사이의 거리는 결코 좁힐 수 없는 거리, 저주받은 거리였다. 그것은 너무 멀어 불가능에 가까웠고, 나는 그 불가능에 온전히 저항 한 번 해볼 수 없었다. 어쩌면 차라리 그게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예 불가능했으므로 나는 바랄 뿐 성취를 꿈꿔 본 적이 없으니까. 처음부터 불가능했으므로 성취를 위해 노심초사할 기회마저 얻을 수 없었으니까. 나는 나의 사랑을 마음 속에만 감춰 둬야 했고, 그것이 고개를 내밀지 못하도록 짓눌러 둬야 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사랑을 짓눌러 두면 그 자리에 열정이, 어두운 열정이, 짐승으로 친다면 아마 두꺼비나 뱀, 지렁이나 지네 따위를 닮았을 그늘진 열정이 생긴다는 것을. 그 어두운 열정은 사랑이 짓눌릴수록 더욱 크게, 더욱 어둡게, 더욱 음침하게, 저 민둥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거대한 철탑처럼 거대하게 자라난다는 것을. 그리고 유일한 위로란 그 어둡고 음침한 짐승과 친해지는 길 뿐이라는 것을. 나는 그것을 두꺼비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보다 더 크게 자라났다. 그 놈음 가끔 꾸억꾸억, 기이한 소리를 내며 울었고, 내 몸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때마다 내 마음 속의 작은 별 역시 공명하는 말굽자석처럼 가늘고 작은 소리로 울었고, 어딘가로, 이 곳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으며, 민둥바위에 머리를 부딪고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에 시달렸다.

 

 

두물머리 - 이윤기

 

▒  어머니는 사립문 옆 돌담에 선 채로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몸 가누기가 힘들었던지 쪼그리고 앉으면서 등으로 돌담을 졌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나는 슬픔이 눈물에 잘 녹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슬픔이 눈물에 잘 닦인다는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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