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고미숙 (그린비,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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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巖憶先兄 「형을 생각하며」

우리 형님 얼굴은 누굴 닮았나?            我兄顔髮曾誰似
아버지 생각나면 형님을 보았지.          每憶先君看我兄
이제 형님 생각나면 그 누굴 보나?        今日思兄何處見
시냇물에 내 얼굴 비추어 보네.             自將巾袂映溪行



▒ 문체는 한 시대가 지니는 사유체계 및 인식론의 표현양식이다. 그것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이나 매개가 아니라 내용을 '선규정하는' 표상의 장치이다. 중세 유럽의 '대학'에서 '수사학'을 주요과목으로 설정한 것을 떠올리면 일단 감이 잡힐 것이다. '어떤 어조와 제스처를 쓸 것인가' 혹은 '어떤 장식음을 활용할 것인가' 하는 따위는 단순한 테크닉이 아니다. 그런 테크닉을 숙련하는 과정 자체가 앎의 경계를 결정한다. 말하자면 문제는 사유가 전개되는 '초험적 장'인 셈이다.


▒ 마치 환자들이 몸에 이로운 것을 꺼리듯이, 고문파들은 싱싱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문장들을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속내를 들춰보면, 그건 이미 논리와 설득의 차원을 넘어서 이권과 여역을 사수하기 위한 '이전투구'의 양상을 띠게 된다. 연암에 대한 숱한 비방들은 그런 점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 "원하건대 천하의 인사들은 돈이 있다 하여 꼭 기뻐할 것도 아니요, 없다고 하여 슬퍼할 것도 아니다.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돈이 앞에 닥칠 때는 천둥처럼 두려워하고, 귀신처럼 무서워하여 풀섶에서 뱀을 만난 듯이 머리끝이 오싹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소경을 볼 수 있는 자는 눈 있는 사람이라 소경을 보고 스스로 그 마음에 위태로움을 느끼는 것이지, 결코 소경이 위태로운 것이 아니오. 소경의 눈에는 어떠한 위태로움도 보이지 않는데 무엇이 위태롭단 말이요.

 보는 것의 위태로움. 그것은 결국 자신의 눈을 앎의 유일한 창으로 믿는 데서 오는 것이다. 감각을 앎의 유일한 원천으로 삼을 때 삶은 얼마나 위태롭고 천박해질 것인가. 이어지는 대목에서 연암은 그 점을 거듭 환기한다.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니 외물이 항상 이목(耳目)에 누(累)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 이 같거든, 하물며 인생이 살아가는 데 있어 그 험하고 위태로운 것이 강물보다 심하고,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이 되는 것임에랴."


▒ 어처구니없어 보이겠지만, 억압의 기호가 졸지에 저항의 징표가 되어버리는 아이로니컬한 상황은 우리 시대에도 적지 않다. 이슬람권 여성들의 '부르카'(얼굴을 가리는 천)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여성억압의 대표적 습속임에도, 서구제국주의의 침략 속에서 그것이 이슬람 문화의 상징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이슬람 여성들은 '벗을 수도 없고, 뒤집어 쓸 수도 없는' 이중적 질곡에 빠지고 말았다. 한족 여성과 전족의 관계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 타인들의 고루한 편향을 보는 건 쉽다. 그러나 그 시선을 자신에게 비추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자신을 기꺼이 타자의 프리즘 속에서 볼 수 있는 건 고정된 위치를 벗어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의 자유에 다름아니다. 연암의 패러독스가 한층 빛나는 건 바로 이런 '자유의 공간' 에서이다.




연암과 다산 : 중세 '외부'를 사유하는 두 가지 경로


▒ ……그런데 어째서 둘은 마치 인접항처럼 간주된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둘을 비춘 렌즈의 균질성이 차이들을 평면화했기 때문이다. '중세적 체제의 모순에 대해 비판했고, 조선적 주체성을 자각했으며, 근대 리얼리즘의 맹아를 선취했다'는 식으로. 실학담론으로 불리는 이런 평가의 저변에 '근대, 민족, 문학'이라는 '트라이앵글'이 작동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비단 연암과 다산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온갖 징후들을 근대성으로 재영토화하는 동일성의 기제이기도 하다. 이 장에 들어 오는 한, 차이와 이질성이 예각화되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텍스트가 '근대적인 것'에 근접한가 아닌가 하는 척도로 계량화되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거기에는 근대적 사유가 지닌 원초적 오만이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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