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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괴로움 벗어 누구에게
산을 올라가다가 이 괴로움 벗어
누구에게 줄까 하다가,
포크레인으로 파헤친 산중턱
뒤집혀 말라가는 나무들을 보았다
薄明의 해가 성긴 구름 뒤에서
떨고 있는 겨울날이었다
잘린 바위 틈서리에서 부리 긴 새들이
지렁이를 찢고 있었다
내 괴로움에는 상처가 없고, 찢겨
너덜너덜한 지렁이 몸에는
괴로움이 없었다
▒ 아, 돌에게 내 애를
아, 돌에게 내 애를 배게 했으니
그 돌 해산의 고통 못 이겨
불 속으로 뛰어들어,
날개 푸른 새처럼 버둥거린다
그 새, 내 눈에서 영원히 발버둥치리
다시는 울지도 못하는 새
▒ 음이월의 밤들
음이월의 밤들은 저마다
꽃핀 동백 가지 입에 물었다
종일 흐리다 환한 밤에는
진눈깨비 다녀가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운 다음날 아침엔
사랑이 지나갔다, 발자국도 없이
▒ 벌레 먹힌 꽃나무에게
나도 너에게 해줄 말이 있었다
발가락이 튀어나온 양말 한구석처럼
느낌도, 흐느낌도 없는 말이 있었다
아, 너도 나에게 해줄 말이 있었을 거다
양말 한구석에 튀어나온 발가락처럼
느낌도, 흐느낌도 없는 말이 있었을 거다
▒ 그렇게 속삭이다가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 슬퍼할 수 없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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