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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로움이니 고매라느니 순결이니 순수이니, 그런 말은 이제 듣고 싶지 않다. 쓰라고. 만담이든, 콩트든 상관없다. 쓰지 않는 것은 예외 없이 나태해서이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맹신이다. 사람은 자기 이상의 일도 할 수 없고, 자기 이하의 일도 할 수 없다. 일하지 않는 자에게는 권리가 없다. 인간 실격, 당연한 일이다.
▒ 살아가는 것도 초조하고, 느끼는 것도 서툴러진다
▒ 문득 잠을 깨보니 방은 캄캄했다. 고개를 들자 배갯머리에 하얀 사각봉투가 한 개 얌전히 놓여 있다. 왠지 철렁했다. 빛날 정도로 순백색의 봉투였다. 단정하게 놓여 있다. 손을 뻗어 주우려고 하자, 헛되이 방바닥을 긁었다. 아차, 했다. 달그림자였던 것이다. 그 마굴 같은 방 커튼 틈으로 달빛이 기어들어와 내 배개 밑에 정사각형 그림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꼼짝 않고 있었다. 나는 달한테 편지를 받았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포였다. 가만히 있지 못해 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고 창을 열어젖혀 달을 보았다. 달은 낯선 타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가 말을 걸려다가 나는 화들짝 놀라 숨을 죽였다. 달은 그래도 모른 척하고 있다.
▒ 인간은 모두 똑같다. 그런 사상은 그저 사람을 자살로 몰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여기저기 쇠사슬이 얽혀있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피가 솟구친다.
▒ 끌려가는 자의 노래라는 말이 있다. 여윈 말에 태워져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가, 그래도 자신의 영락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태연한 듯이 말 위에서 나지막히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 것이다. 쓸데없는 오기를 조롱하는 말이겠지만, 문학 따위도 그런 것은 아닐지.
거짓없는 신고
▒ 말 없던 피고가 돌연 일어나 말했다.
"저는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더 알고자 합니다. 저는 솔직합니다. 솔직하게 진술하려고 합니다."
재판장, 방청객, 변호사들조차도 무척 명랑하게 웃고 떠들었다. 피고는 앉은 채, 결국 그날 하루종일 자기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밤에 혀를 깨물어 차가워졌다.
▒ 너희들은 고뇌의 능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능력도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너희들은 애무할지는 모르나, 사랑하지는 않는다.
-사카구치 안고,「타락론」
▒ 전쟁에 졌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고 살아있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다. (중략) 인간은 추락할 수 있는 데까지 추락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도 인간과 함께 떨어져야 한다. 떨어질 데까지 떨어져서 자기 자신을 찾아내고 구원해야 한다. 정치에 의한 구원 따위는 피상적이고 웃기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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