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초상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문열 (민음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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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들의 귀중한 역할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요. 다만 싫은 것은 지성인 내지 대학생은 모름지기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획일주의나 정의와 양심과 용기는 참여하는 쪽만이 독점하고 있다는 식의 흑백논리요. 사회의 의식도 문화의 일부일진대, 그 다양성은 상호간 존중되어야 한다고 보오. 거리로 뛰어나가 기성세대의 불의와 부패를 규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서관이나 강이실에 남아 학문적 고구(考究)나 예술적 연마에 힘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뜻이오. 문제는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선택하는 의식의 순수함과 실천의 성실함일거요……."



▒ '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끝나도 좋을 때다. 바다 역시도 지금껏 우리를 현혹해 온 다른 모든 것들처럼 한 사기사(詐欺師)에 지나지 않는다. 신도 구원하기를 단념하고 떠나버린 우리를 그 어떤 것이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돼야 한다. 갈매기가 날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갈매기가 아니고, 존재가 그 지속의 의지를 버렸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역시 눈비로 얼룩진 그날의 수첩은 그렇게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그 갑작스럽고 당돌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에 따른 원인 모를 허탈과 슬픔까지 극복해 낸 것 같지는 않다. 절망의 확인이란 아무리 냉철한 이성이라도 그 이성만으로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나는 그 바닷가의 바위에 기대 한동안 울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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