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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에서 보기에 우리의 '성공'을 가능케 한 것은 제대로 된 노동 생산성의 향상이나 기초과학 성과의 장기적 축적, 내수 시장의 원만한 성장이라기보다는, 노동자로 하여금 말도 안 되는 대우를 감수하며 죽도록 일하게 만드는 '생존 공포'의 분위기다. 나는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화려한 영화를 재미있게 봐도 과연 그 전투 장면을 어렵게 연출해낸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일당으로 얼마를 받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떨쳐낼 수 없다. 상품이 아무리 좋아도 그 상품을 만든 인간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않았다면 '노예 노동의 결실을 즐기고 있다'는 가책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 조선 후기의 초기 교회에서 예배를 본다는 것은 목숨을 건 신앙적 자아실현이었는데, 그것은 이후 다들 일률적으로 예배를 보거나 보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미션 학교에서 자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신에 대한 모독으로 변질됐다. 전교 학생들에게 예배를 억지로 강요하면서 신을 숭배하는 것은 과연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인가? 무섭게도 그들이 실제로 믿는 것은, 그렇게 인권을 유린해도 '주류' 사회의 견제를 받지 않을 만큼 강하고 든든한 그들의 조직과 영향력이다. 약육강식의 논리를 받아들인 그들에게는 힘 센 자와 가진 자야말로 복 받은 자이며 영웅이다. 힘의 논리를 부정함으로써 2천 년 전에 출발한 기독교는 이제 이 땅에서 그 정반대로 둔갑하고 만 것이다.
▒ 국가적 살육은 폭력성의 극단적인 형태지만 전쟁 이외의 자본주의 세계에 내재돼 있는 폭력 장치들은 무수하다. 예컨대 사회적 자원(신분상승, 위신 등)을 놓고 벌이는 경쟁을 인간의 폭력화에 가장 많이 기여하는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학교에서의 성적 경쟁도 '남들은 다 잠재적인 적' 이라는 폭력적 의식을 주입하지만, 유치원 때부터 하는 대항적인 스포츠도 경쟁이라는 형태의 규범화된 폭력을 내면화한다.
▒ 현대판 '양민'에 대한 폭력적인 훈육이 '국가 질서'의 골자가 되어 민간 사회의 생활까지 군사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피지배민 사회의 근간이 된 예비역 집단이 여성과 연소자, 종족적 소수자나 장애인 등에 대한 우월적 태도나 노골적 폭력을 통해서 군에 빼앗긴 세월과 건강에 대한 심적 보상을 받으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병역 담당 집단이 국가적 동원에 잘 응하는 한, 소수자에 대한 '원풀이'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군 당국의 입장에서는 마초야말로 진정한 군인으로 보인다.
▒ …… 내가 보기에는, 유승준이 바로 이와 같은 대상이 된 셈이었다. 가시적으로 병역을 면하게 된 데다 우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남이 됨으로써 우리의 국가주의적, 집단주의적 감정을 건드린 그는, 국민 개병제의 억압으로 인한 원한을 풀 수 있는 최적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유명한 현대 사상가인 마루야마 마사오가 이야기했던 억압 이양의 좋은 사례가 아닌가 싶다. 윗사람들에게서 받는 억압감을, 우리의 외부자가 돼버린 유승준에게 푸는 셈이 되는 것이다.
▒ 제도권 교육과 언론이 '신성한 병역'을 들먹일 때는, 그들의 기만성이 그대로 노정된다. 징병제가 만들어질 때부터 현재까지 그들에게 병역이 언제 한 번이라도 '신성' 했는가? 그들에게는 군복을 입은 민중을 제국주의 전쟁에서 희생시킬 권리만 그야말로 신성했다.
▒ 인간의 비폭력적인 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근대국가들은 ─ 특히 20세기에 들어와서 ─ 엄청난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1945년 이후 전쟁의 주요 대상자인 제3세계의 유색인종들을 야만시 · 이질시 · 비(非)인간시하게끔 모든 매체에서 오리엔탈리즘적 언사와 이미지를 늘 내보내고, 텔레비전과 비디오 시장, 전자 게임 시장이 폭력물로 채워지도록 허용해준다. 어릴 때부터 화면에서 폭력을 배워온 사람의 정신세계는 크게 바뀌게 된다.
▒ 진정한 의미에서 강한 근대국가는, 바로 국가의 '모든 것'에 대한 시민들의 반대와 비판과 부정(否定)을 무조건 허용해주는 것이다. 강한 국가는 국가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지킬 만큼 강한 시민을 가진 나라를 말한다.
▒ 외세 침략과 같은 외부적 모순들은 박물관의 전시에 반영되지만 '우리' 역사의 내부적 모순들은 주로 은폐된다. 예컨대 '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리는 불상의 조성이 사찰 노비의 강제된 노동과 국가라는 폭력 조직의 보시로 이루어졌다면 그건 부처의 가르침으로 보아 심각한 모순이다. 그러나 박물관은 비판의식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름다운 우리 역사'는 감상용이지 반성용이 될 수 없다.
▒ 미국 · 유럽연합과 같은 초대형 국가에 기대는 핵심부자본에 의한 지구적 · 국제적 근로자 생존권 박탈과 환경 파괴는, 결국 역으로 각국 출신들이 국적을 따지지 않고 참여하는 현재의 반세계화 시위들이 시사하는 전 지구적 · 국제적 · 초(超)민주적 저항에 부딪히고 말 것이다. 이미 만성적 위기에 봉착한 후기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각종 재앙들이 국적을 묻지 않고 지구를 파괴하는 것처럼, 지구를 살리려는 민중들에게는 민족보다 훨씬 상위의 정체성이 있다. 예컨대 온실효과로 수위가 높아져 오대주의 해안 저지대들이 침수 위험에 처했을 때, 그 지구적인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서 민족을 거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 친일이 아닌 지배계급 그 자체와 조선에서의 종속적 형태든 일본에서의 패권적 형태든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를 규탄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친일 청산 과정에서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흘러갈 위험을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극우주의로 치닫고 있는 일본의 진보 세력들과 연대하여 동아시아에서 군국주의 망령의 그림자가 다시 고개를 쳐드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우리나라 일본이나 마찬가지로 말기적 위기에 봉착한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극복만이 민중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 민족의 구분을 넘어 반 자본주의의 길로 가자는 차원에서는 단순히 친일이나 친외세 아닌 모든 형태와 종류의 자본주의적 야만을 역사 속에서 규명하여 규탄, 단죄해야 할 것이다.
▒ 필승 코리아와 대한민국 같은 구호가 국민의 귀에 박혔던 월드컵 열기의 본질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부르주아 민족주의'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부르주아'라는 것은 '붉은악마'의 재벌 후원자와 축구 열기를 열심히 부추겼던 재벌 언론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축구 열기 속 사회적 관심의 결여, 비판적인 사고의 부재, 운동 행사에 대한 소비주의적 태도 등도 '부르주아'와 같은 단어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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