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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따금 나는 결핍된 삶 속에 영원히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비교적 통증이 없는 권태가 나에게 일상적인 삶을 계속 살게 할 것이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착각이다. 지속되는 권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만간 확실한 통증이라는 고통스러운 깨달음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내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 우리는 호텔을 향해 걷는다. 길에는 비가 오기 시작한다. 이렇게 루앙에서의 첫날밤이 저문다. 그리고 너무나도 확실하게, 나는 안다, 남은 날들도 틀림없이 비슷하리라는 것을.
▒ 슈퍼마켓이란 곳이 늘 그렇듯이(더구나 한창 붐비는 시간에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나 카트를 밀고 다니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어수선한 분위기인데, 그 속에서 맞게 된 죽음을 품위 있는 죽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누벨 갤러리 CM 송까지 기억하고 있다(아마 요즈음은 바뀌었겠지만). 특히 후렴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누벨 갤러리, 오느늘……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이랍니다…….>
▒ 몇몇 주민들은 벌써 일어났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차장에서 내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내가 거기서 무얼 하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이 내게 그렇게 물었다면, 나는 대답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사실 내가 거기에 있을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내 존재를 정당화할 명분이 없었다.
▒ 결국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히 섹스도 차별화의 또 다른 체계를 보여 준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돈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또한 냉혹한 차별 체계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체계의 효과는 엄밀히 똑같다. 무제한적인 경제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섹스 자유주의는 <절대 빈곤> 현상을 낳는다. 어떤 이들은 매일 사랑을 하는데, 어떤 이들은 평생에 대여섯 번뿐이다. 어떤 이들은 열댓 명의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여자가 한 명도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장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해고가 금지되어 있는 어떤 경제 체계에서는, 각자 어느 정도 자기 자리를 찾는 데 성공한다. 간통이 금지된 섹스 체계에서, 각자는 어느 정도 자기 침실 파트너를 찾는 데 성공한다. 완전히 자유로운 경제 체계에서, 어떤 이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실업과 가난 속에 허덕인다. 완전 자유 섹스 체계에서 어떤 이들은 정말로 다양하고 짜릿한 성생활을 즐기지만, 다른 이들은 자위 행위와 외로움 속에 늙어간다. 자유주의 경제는 투쟁 영역의 확장이다. 그 사회의 모든 연령층, 각계 각층으로의 확장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섹스는 투쟁 영역의 확장이다. 그 사회의 모든 연령층과 각계 각층으로 자신의 투쟁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경제적 차원에서, 라파엘 티스랑은 승자이지만, 섹스 차원에서는 패자이다. 어떤 이들은 그 두가지 다 성공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두 가지 모두 실패한다. 기업들은 학위나 자격증을 가진 젊은이들을 놓고 다툰다. 여자들은 일부 젊은 남자들을 차지하려 한다. 남자들은 일부 젊은 여자들을 차지하려 한다. 그 와중에서 일어나는 동요와 혼란은 심각하다.
▒ 어쩌면 오늘 나는 박사 학위 과정의 어떤 논문에 나오는 다른 여러 가지 구체적인 경우 중에서 막연한 어떤 존재를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기록의 일부가 되었다는 느낌이 나를 안심시킨다. 나는 단단한 제본, 약간 슬픈 표지의 책을 상상한다. 나는 책갈피 속으로 몸을 수그린다. 나는 몸을 웅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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