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텍스트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성기완 (문학과지성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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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너와 오랄하고 싶어
너의 빨간 암술을 헤치고
노란 수술을 빨고 싶어

당신은 화장실에 버려진 생리대
지켜지지 않은 백만 년 된 약속
팬티 속에 차고 다닐래
나도 당신처럼 생리할 거야

피흘리며피어날거야




▒ 해피 뉴 이어 2

칼로 찌른 것도 아닌데
낭자
당신은 유혈이
낭자
하군요 하긴
한때 내가 거길 찢고 나왔죠
황홀한 자상을 입고
피범벅으로 좋아 죽는
당신은 생리 중
아무리 조심조심 휘둘러도
아 결국 사랑은 칼부림




▒ 날고기 블루스

비밀 번호를 아는 문 앞에서
마치 모르는 것처럼 아무 번호나 눌러서
들어가지 못해야만 하잖아요
사랑하는데 사랑하지 못하겠다고
말해야만 하잖아요
내 이야기는 들려줄 수도 없고
당신 새 방 향기는 맡아볼 수도 없게 됐잖아요

털썩

작곡을 한다는 고래의 노래를 들으러
그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요
낮에도 밤에도 밤일 그곳에 들어가
송장 같은 내 몸을 침대에 던질래요
침대 사준다고 해놓고
그 약속도 못 지키게 됐잖아요

그래도 드리고 싶은 마음 억누를 수 없어
드리긴 드려요 들어보세요, 당신이 좋아할
라디오헤드의 새 노래를
드리긴 드려요,라는 표현을 쓰게 됐잖아요
누구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됐다구요

앞으로의 시간이 붉은 날고깃덩이처럼
내 앞에 던져져요
그걸 나 혼자 어떻게 구워 먹으라고
어떻게 그걸 질겅질겅
혼자 씹으라고


(첨부파일) radiohead_bodysnatcher.mp3




▒ 내 깊은 곳의 당신

내 깊은 곳의 당신은
내 바로 곁에 있는데
나는 널 찾아 창녀촌에 간 적도 있다
당신은 이렇게도 조용하고 상냥하게
내 깊은 곳에 동시에
바로 이 방바닥에 나를 응시하며
앉아 있는데
그러나 나는 널 찾아 헤매고 헤매다
때로는 퍼붓는 빗속을 뚫고
어둠을 건너 살아온
초식 동물 같은 당신에게
내 거길 빨라고 시킨 적도 있다
내 깊은 곳의 당신
나의 불같은 당신
조용히 타오르는 넌
나의 바로 곁에서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있는 당신
지나가는 오후에 그 누구도 모르게
욕정을 태우는 빨래터의 너
내 깊은 곳에 숨은 나의
범죄 조직
두말없이 돌아서면 그만인
단번에 끝나는 은밀한 현기증인

내 깊은 곳의 착하디 착한
당신




▒ 오늘의 운세, 67년생

이런저런 감정의 카드들을 뒤집는
나날이야
이를테면 오늘의 카드명은
추억 십자가 가슴팍의 통증
발끝에서 노란 연기가 빠져나간 날이니까
그런 날엔 어깨를 굽히고 두 손으로
엄지발톱을 잡으며
고개를 들어 창문을 봐야 해
혹시 날아가는 것들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난 서성여
니 눈동자가 땅에 떨어져 있나 궁금해서
혓바닥으로 낙엽을 핥아
불붙이지 마 가급적이면 그냥
놔둬 이대로 꺼지게
무슨 상관이야 꺼져
없던 것처럼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치르는 전쟁들
이제는 항복이야 그게 오늘의 카드가 주는
메시지 행복해 난 지금
오랜만에 맑은 정신이니
제발 좀 놔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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