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알베르토 모라비아 (열림원, 2005년)
상세보기


▒  가끔씩 이런 권태가 극심해질 때면 혹시 내가 죽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지 내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했다. 사는 것을 내가 너무나 혐오스러워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사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모든 일이 음울한 춤처럼 쌍을 이뤄 교대로 내 머릿속에 침투해 들어왔는데, 그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내가 종종 생각했듯이, 나는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을 그렇게 원치 않았듯이 죽기를 간절히 바라지도 않았다.


▒ 갑자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질문에 만족감을 느끼는 동시에 너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몇 시간 동안 어머니에게 질문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래도 마찬가지로 전혀 결론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생활과 어머니 자신은 이미 완전히 의미가 결여된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결국 이것은 어리석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 그 자체의 신비와 똑같은 것이었다.


▒ 나는 평상시 느끼는 예리한 권태감 때문에 괴로웠다. 내가 권태로워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모른다는게 이상했다. 그러니까 내게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점 말이다. 그들은 눈치채기는커녕 우리 어머니처럼 계속 내게, 마치 내가 전혀 권태로워하고 있지 않은 양 행동했다. 


▒ 그런데 완벽한 그 그림들은, 비록 추잡하게 완벽하긴 하지만, 그 그림들은 바로 두말할 필요도 없는 포르노 그림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발레스트리에리의 세계는 구체적이고 일관성이 있는 세계로, 틈도 없고 전혀 오염 되지도 않은 세계였다. 그게 광적인 인상을 주느냐 그렇지 않냐는 별로 중요하지가 않았다. 발레스트리에리, 그는 이 세계 속에서 죽을 때까지, 그 세계에 대해 의심을 품지도 않고 그 세계에서 나오려고 할 것도 없이 너무나 잘 지냈다. 발레스트리에리는 어쩌면 미치광이였는지도 모른다. 미치광이이긴 했지만 그의 광기는, 그림이 증명해주듯이, 현실과 자신이 관계를 맺고 있다는 환상, 혹은 자신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환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발레스트리에리와는 달리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데, 어쩌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정신은 현실과의 관계를 맺는 게 불가능하다는 확신으로, 아니면 제정신이긴 하지만 내가 미쳤다고 믿는 그런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 "생각할 수 없어요. 일부러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는 없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거지요."
 "아가씨 말대로라면, 요 근래에는 자연스럽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당신 생각이요."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체칠리아는 항상 같은 시간에 나를 찾아와서 똑같은 시간만큼만 머물다가 갔다. 모든 게 언제나 똑같았다. 그래서 그녀가 찾아온 날 하루를 묘사하면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게 될 것이다.


▒ 모든 일은 다 예상이 가능하다. 그 예상했던 일이 우리에게 불어 넣어준 감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말이다.


▒ 다시 그녀를 갖는다고 해도 그녀를 소유하지 못한 지금보다 더욱더 그녀를 소유하지 못할 것임을,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절대 그녀를 소유하지 못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게서 달아나는 것은, 너무나 기쁨에 들떠 있는 것 같은 그녀의 육체가 아니라 그녀의 육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단 한가지 일은 그것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