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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쓰코는 그를 감정의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부동, 평정, 항상 변하지 않는 이런 태도는 예사로운 게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한 발 한 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세쓰코는 점점 쓰치야에게서, 또는 쓰치야의 실체에서 멀어져 자기 혼자 그린 공상의 영역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공상은 육체를 알게 되기까지의 그것과는 달랐다. 쓰치야를 눈앞에 두고 그의 몸을 접촉하면서, 그리고 그가 없는 동안에도 목소리의 울림이나 냄새만을 쫓으면서 세쓰코는 순식간에 꿈을 꾸었다. 남자는 아주 능숙한 간호인이 되어 몽유병 환자를 다루듯이 여자를 다루었다. 이 환자는 그의 눈앞에 있으면서도 노골적으로 그를 꿈꾸고 있었고, 더군다나 결코 그를 직시할 염려가 없었다. 환자가 눈을 뜨지 않도록 남자는 그녀의 주위를 부드러운 말투와 평온한 동작으로 항상 발소리를 죽여 가며 걸었다.
▒ 올해 들어 비로소 그녀가 알게 된 것은 질투의 고독감, 초조함, 지향 없는 분노를 잠재울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질투의 대상, 증오의 대상인 적에게 애원의 손길을 내미는 일이었다. 애초부터 유일하게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당사자인 적 외에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적의 검에 매달려 약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세쓰코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하는 것, 자신을 분석하는 것, 이런 것은 모두 필요에서 생겨난다. 세쓰코는 자신이 행복한 종족에 속한다는, 타고난 자신감을 상실해 버렸다.
▒ 그 쓰치야라는 사람은 아마 지금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야. 그런 인간은 손쓸 방도도 없고, 게다가 당신은 그 남자한테서 사랑의 증표만은 확실히 받고 있지. 사내는 이제 당신에게 자신의 힘을 휘두르고 그 힘의 영향을 시험하는 데에만 흥미가 있어. 그렇다면 육체적인 일은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간단하겠지만, 그게 습관이 되고 보면, 습관에는 거짓도 진짜도 없거든. 정신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습관이란 괴물뿐이야. 당신도 이 사내도 이 괴물의 먹이인 셈이지. 그렇지만 인생에서 그것은 그렇게 부끄러워할 일이 아냐. 당신이 꼭 패배자인 것도 아니고, 또 사내가 꼭 승리자인 것도 아니야.
▒ 고통의 유익함 중 하나는 뭔가 영혼에 유익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상도, 또 어떤 감각도 격렬한 고통만큼 명석함에 달할 수 없다. 싫든 좋든 간에 고통은 세계를 직시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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